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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Nov 09. 2021

아버지와의 대화


지난해 늦봄 무렵부터 말기 암 판정을 받아 병원을 오가시던 아버지는 최근 두 달 가까이는 병세가 심각해져 아예 병원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오가셨다.  


그새 의사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말을 두세 차례나 들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고통을 잘 견뎌내셨다. 담당의사는 “아버님께서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하신 것 같다”며 우리를 위로했다. 


오랜 시간 의식을 잃었다가도 용케 회복하셔서 자식들을 알아보기도 하셨고 다른 가족들 안부도 물으셨다.

소소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그날도 오전에는 조금 기운을 차리셨지만 점심 무렵이 지나 다시 의식을 잃으셨다. 그리곤 가쁜 숨을 몰아쉬셨다. 몇 시간이 흘렀고 시간은 밤 10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도 반응이 없었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아버지는 혼자 지내셨다.

가끔 식사를 모실 때면 젊은 사람 못지않게 드셔서 평상시 혼자 드시는 게 소홀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죄스러웠다. 오래전 생긴 병으로 원거리 이동이 사실상 어려워 늘 베란다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성경책과 신문을 읽는 단조로운 삶을 반복하셨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버지가 특별히 좋아하시던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슨 계절을 좋아하셨는지, 취미가 무엇이었는지, 평소 어디를 여행하고 싶어 하셨는지,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어머니 계신 곳을 얼마나 자주 방문하고 싶어 하셨는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스무 살 청춘의 나이에 6·25가 발발했고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했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더 전선을 지키셨다. 전쟁 기간 죽은 전우들이 쓰러져 있는 계곡에서 ‘눈물 반 핏물 반’의 개울물을 마신 기억이 생생하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평생 그 시절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전쟁 기간 포병으로 복무하셨던 아버지는 그때 한쪽 귀의 청력을 거의 상실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다. 말년에 하소연 삼아 처음 얘기를 하신 모양이다. 남자는 가정과 나라를 위해 한 희생은 마음속에만 묻고 사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사셨던 모양이다. 전쟁 중 허리에 부상을 입었다는 얘기도 생전 어머니로부터 들었었다.


그런 몸으로 아버지는 어렵고 힘든 1960년대와 70년대를 한 집안의 가장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묵묵히 지내셨다. 당신에게도 얼마나 어려운 시절이었을까. 


며칠 전 오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전히 마지막 가쁜 숨을 쉬시던 아버지에게 할 말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전에는 얼굴을 뵈며 마주 앉아 있어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더니 지금은 머릿속에 할 말이 가득하고, 마음속에 묻고 싶은 말이 넘쳐난다.


아버지는 늘 남을 위한 일생을 사셨다. 성직자도 아니었건만 당신의 가정보다 남들의 힘든 생활을 동정하셨고 그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은 늘 식구들 몫으로 돌아왔다. 어려운 생활을 호소하는 친척이나 친구를 위해 집을 담보로 제공하거나 보증을 서고 이익의 대부분을 먼저 양보하는 게 다반사였다. 어머니가 가장 큰 피해자였다. 자녀들도 피해자였다.


아버지와 충돌이 빈번했던 것은 고통을 가족에게 넘겨주고도 늘 무심했던 아버지의 태도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2년 여 전 먼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성마른 자식을 위로했고 그런 아버지를 이해시키려 애를 쓰셨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를 놓고 학술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많은 연구와 이야기들이 있다. 소원했던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그 안 어디쯤엔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생긴 커다란 공허함으로 인해 그런 주장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91세 생신을 두 시간 여 앞두고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여행을 떠나셨다. 가시는 먼 길에 이따금씩 쉬시며 남겨두셨던 얘기들을 꿈속에서라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 살아생전 하고 싶었던 대화는 이제 하늘을 바라보며 독백으로 남게 되었다. 밤하늘을 보는 습관이 더 길어지게 되었다. 천국에서 어머니와 아무 고통 없이 평안을 누리며 지내시길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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