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영국의 재래시장에 가서 사람들이 계산하는 방법을 목격하고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야채가게에 들러 일주일치 분량의 과일과 채소를 구입하고 계산을 할 때마다 상인들이 짓는 표정을 보고 난 이후다. 영국 화폐의 가장 큰 단위는 50파운드짜리 지폐. 그리고 20파운드, 10파운드, 5파운드 지폐와 2파운드, 1파운드 동전이 있다. (파운드 이하는 펜스가 있다).
가령 물건 값이 23파운드가 나왔고 내가 50파운드 지폐를 건네주면 상인들은 대개 당황해했다. 그리곤 돈 바구니에서 돈을 꺼내 50을 맞춰가며 정산을 했다. 1파운드 동전 두 개를 내 손바닥에 얹어 25를 만들고, 5파운드 지폐를 한 장 또 얹으며 30, 그리고 10파운드 지폐 두 장을 다시 얹어주며 50을 맞춘 다음에야 비로소 계산이 잘 끝난 거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매주 한 번씩 주말에 장을 봤으므로 이런 풍경은 내게도 익숙한 일이 되었다. 생선가게나 정육점도 마찬가지였다. TESCO나 Sainsbury 같은 대형 마트에서는 카드로 쉽게 해결하니까 이런 일이 별로 없지만 재래시장은 늘 이런 모습이었다.
점차 상인과 얼굴을 익히고 서로 농담을 하는 관계가 되면서 나는 50파운드짜리 지폐를 낼 때마다 내가 받을 돈을 미리 말했다. 32파운드가 나왔을 때는 18파운드 거스름돈을 달라고 말했고, 17파운드가 나왔을 때는 33파운드를 내게 주면 된다고 했다.
영화 ‘노팅힐’의 남자 주인공 휴 그랜트처럼 생겨 야채가게를 운영하기엔 인물이 아까워 보이는 젊은 가게 주인은 처음에는 내 암산에 적잖이 놀라는 것 같더니 단골이 되면서 내가 가게 입구에 들어서면 수학천재가 왔다고 웃으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빨리 계산하느냐”며.
그는 주변 상인들에게 입소문까지 내주었다.
나는 그게 영국인들의 유머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게 그들의 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과 달리 우리는 보통 계산을 해서 딱 떨어지는 셈을 한다. 가령 50에서 27을 빼면 23이 남아 머릿속에는 제로상태가 되는 완벽한 셈법이다. 뭐든 이런 식으로 딱 떨어지는 깔끔한 셈법을 우리는 선호한다. 이런 인식은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애매모호한 것보다 ‘도 아니면 모’라는 분명한 결론을 선호한다.
그럼 영국인들은 어떨까.
우리가 보통 계산을 해서 딱 떨어지는 깔끔함을 선호하는 반면에 그들의 셈법에는 넉넉함이 있다. 그들은 빼기보다는 계속 더하는 방식으로 목표를 달성해 나간다. 앞서 얘기한 야채가게 주인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이런 관습은 다양한 분야에서 보편적인 경향을 띠는데 궁극적으로는 영국 사회를 넉넉하고 관대하며 풍요롭게 만든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사계절이 뚜렷하고 그 덕분에 다양한 농사가 가능한 한 우리와 달리 영국은 척박한 환경 속에 비와 바람이 잦은 편이라 감자와 당근 정도 외에는 특별한 농산물이 있나 싶다. 사과나 배도 재배하지만 우리 것과 비교하면 맛은 천지 차이다. 영국은 자연환경면에서도 우리보다 더 열악한 형편이라 끊임없는 인간자원의 개발로 국가발전의 초석을 쌓는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일본처럼 지리적으로 가까운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척박한 환경의 영국과 프랑스의 비옥한 토양과 햇살 가득한 기후 차이는 “프랑스라는 나라는 저런 인종들이 살기에는 참 아까운 땅”이라는 탄식이 영국인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오래전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50대 중반의 영국 신사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인데 자신들과 대비되는 프랑스의 기후와 자연환경이 부러운 나머지 은근한 질투심에서 나온 마음속 표현임이 분명하다.
그런 형편이니 인간자본의 양성을 위한 노력은 치열하다.
창조 능력이 필요한 예술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영국인의 창의성은 가히 세계적이다. 어릴 적 교육이 그 바탕이 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발전한 인물과 문화자산이 다수를 먹여 살린다. 창의적인 교육과 거기에서 체득한 창조적인 사고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성장과 발전에 눈에 띠지 않는 엄청난 무기이자 자산이다.
영국에서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독특하고 도발적인 발상, 혹은 집단이나 사회에서 절대적 소수 의견이 되는 견해에 대해서도 격려하고 응원하는 전통이 존재한다.
“비록 지금은 너 혼자의 생각이지만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견해가 될 거야.”
학교나 조직 내에서 왕따 문화가 존재하며 주관식 문제에서조차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우리의 딱한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화다.
셰익스피어와 디킨스를 탄생시키며 세계 문학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영국 문학은 이혼녀이자 싱글맘, 그리고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며 글을 쓰던 조앤 롤링에 의해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창의적이고 고유한 견해를 발전시키며 시민들을 자극하고 시민들도 이들의 노력과 성과를 지지하고 지원한다. 그들에게 인간적인 흠결이 왜 없었겠는가.
이렇게 ‘더하는 문화’ 속에서 영국은 다른 국가 작가들의 작품들을 재해석하여 ‘세계 4대 뮤지컬’(Big Four)을 탄생시켰고, 각국의 재주 있는 선수들을 받아들여 세계 축구리그를 선도하는 ‘영국 축구리그’(EPL, English Premier League)라는 거대한 축구시장을 운영하는가 하면, 과거 식민지 국가들을 묶어 다양한 인종을 백인사회인 영국에 융합시키며 ‘영연방’(the Commonwealth)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결국은 ‘영국 제품’(Made in UK)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 (법, 금융시스템, 의회제도 등은 너무 거창한 분야가 되니 설명을 생략한다). 영국의 더하기 문화가 앞에 놓인 신선한 재료들을 이렇듯 세계적인 작품으로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한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는 어디든 다재다능한 인물일수록 구성원들 사이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어서 그런 인물들이 성장의 정점을 찍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우리 사회가 특히 그렇다. 우리는 어느 조직에서든 선배나 동료, 그리고 후배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능력 있는 인물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간에 낙오자로 전락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그런 인물일수록 대부분 견제나 질시, 그리고 모함으로 자리에서 일찍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해결할 적합한 인물을 찾기 어렵다. 그저 연줄에 의존하여 자리나 보존하고 있던 위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니 힘없는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사례는 수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민낯이다. 유일하게 가진 자산이 인간자본 밖에 없는 나라에서 세계적 인물의 배출이 어려운 것이 그런 문화 탓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한국인들은 대개 서구 선진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손흥민이나 조수미 등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가 된다.
“만일 손흥민이 국내에서 축구인생을 시작했다면 지금쯤 특별한 존재감이 없는 평범한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축구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다.
사람은 서구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려와 칭찬, 그리고 과오나 실수를 감싸주는 문화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특정 인물이 갖고 있는 능력을 모함하고 폄훼하는 문화와 토양 속에서 어찌 위인이 나오겠는가. 사람을 헐뜯는 문화는 결국은 다 같이 망하자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유독 극성이다. 오죽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이 생겨났을까.
영국의 650명 하원 의원들은 민주주의의 모국답게 개별 사안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한다. 영국 하원의 토론은 상대를 앞에 두고 벌이는 정책 논쟁이다. 따라서 자질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안 되는 함량 미달의 각료나 정치인들은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또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실현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주장은 곧바로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질책을 받는다. 그런 만큼 토론은 치열하고 종종 의장으로부터 질서를 유지해달라는 명령이 떨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논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익 앞에서는 예외 없이 단결한다.
300명 우리 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속한 당과 자신이 속한 파의 이익을 위해서 국익에 손실을 가져오는 문제들 앞에서도 쉽게 분열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임금은 두 명의 사신을 일본으로 보내 정세를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그들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을 보고 온 두 사람 중 한 명은 ‘바람 앞에 촛불’의 처지가 된 나라를 두고도 자파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지경이니 왜적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국토의 유린은 이미 예견되었다.
오늘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실체를 두고 여야 정치권은 국민에게 서로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아귀처럼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430년 전과 지금의 현실이 뭐가 다른가.
그런 위인들에게 현실에 더해 더 큰 국익을 창출하는 비전이 있을까.
2015년 자유기업원은 1인당 GDP 대비 국회의원의 연봉이 영국은 2.6배, 독일은 2.9배, 미국은 3.4배인데 반해 한국은 5.2배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절로 탄식이 나오는 수치다. 오히려 국민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일반 국민에 비해 5배가 넘는 많은 녹을 수령 하면서 그들은 도대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집단이 운영되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상품을 놓고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가성비나 국가나 기업에서 이익창출 판단의 수단이 되는 효율성, 그리고 올바른 인간을 판단하는 핵심 요소가 되는 양심이라는 면에서도 그들은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도태되어야 마땅한 이런 부류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는 우리 사회도 얄팍한 지식으로 눈치 빠른 셈법이나 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익에 해를 끼치는 현실조차 판단할 줄 모르는 인물을 양성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목표를 위해 정진하는 지혜로운 인물들을 양성하는 안목을 갖게 되기를 고대한다. 지식과 지혜는 인간에게 모두 필요한 덕목이지만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지식에 더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