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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Jan 29. 2022

진부(珍富)에서의 추억


‘바깥에 눈이 내려요.’

그녀가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내뱉었다.

‘강원도에서 눈이 내리는 게 여전히 신기할까.’

그래도 그녀는 반가운 듯이 감탄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도 차분히 내리는 흰 눈이 아름다우니 그녀에게는 더하겠지.’


정선 가는 길에 늦은 점심을 위해 우연히 들른 진부 시내는 고요했다.


눈이 내릴 것을 진작 알았다는 듯이 거리에 인적은 드물었고 운행하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는 괜찮았어요.’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한때 진부(珍富)는 동네 이름처럼 강원도에서도 부자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어요.

그때는 시내도 흥청거렸고, 객지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지요.

길가에 유흥주점도 몇 개는 되었으니까요.’


고요를 견디기 어려웠던 탓일까.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연거푸 쏟아냈다.





진부에 자리 잡은 지는 15년쯤이 되었다고 했다.

‘말투가 경상도 분 같은데 음식도 정갈하니 맛이 어찌 이리 좋대요?‘


‘남편이 전라도 사람이었어요.’

그 덕에 시집와서 음식 솜씨가 늘었다고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편을 많이 사랑했었나 보다.’

그녀는 경남의 제법 큰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했다.


작은 식당답게 메뉴는 단출했다.

식사메뉴로는 소머리 국밥과 육개장. 안주로는 수육과 오징어 볶음이 전부였다.


벽에 붙은 오래된 메뉴가 동절기 메뉴로 만둣국이 있고 하절기에는 콩국수도 있다고 은근히 힘을 보탰다.


겉절이를 잘 무쳐서 익힌 배추김치와 적당히 익은 깍두기, 그리고 무와 잣을 넣어 무친 오징어젓갈과 싱싱한 맛이 살아있는 콩나물 무침은 파를 숭숭 썰어 무심한 듯 집어넣은 뜨거운 소머리 국밥과 잘 어울렸다.


국밥 안에 들어있는 고기는 휴가 나온 군인 아들을 위해 준비한 듯 풍성했다.


국밥 한상으로 그녀는 늦은 식사에 허기져 있던 우리 일행에게 정성 가득한 속내를 다 보여주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국밥에 반주로 곁들인 소주 한잔을 들이켜며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코로나로 위축되어 있던 마음이 저만큼 멀어진 듯했다. 


‘또 길을 가셔야 하니 한잔씩 하고 가세요.’

식사를 마치자 그녀가 커피를 내려 가져왔다.

서울과 불과 170킬로 떨어진 곳의 인심이 그렇게 달랐다.


편히 앉아 차를 마실만한 공간은 안쪽에 있었다.





벽지는 오래된 신문들이었다. 

벽에 붙어있는 1976년 연 초에 발간된 일간신문들이 눈에 띄었다. 46년이 지난 같은 달에 자신들의 사연을 읽어줄 나그네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어느 신문에는 ‘카스트로가 케네디 암살을 지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고, 또 다른 신문에는 ‘17개월 봉급이 컬러 TV 한 대 값’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차를 마시는 내실은 내게도 낯설지 않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지나온 어린 시절의 공간이었다. 


진부에서는 옛 시절을 느끼고 왔다.


가게 여주인의 인심이 그랬고 시내 풍경이 그랬다. 푸근한 인심으로 국밥은 더 풍요로웠고 넓지 않은 신작로 풍경은 눈을 맞으며 뛰놀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눈 내리는 한겨울에 어릴 적 친구들과 우연히 둘러본 진부 시내의 풍경과 추억을 가슴 저 편에 넣어두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공간 깊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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