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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Feb 11. 2022

어느 세일즈맨의 눈물


외국에 나가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오래전 영국에 갔을 때 그 말을 실감했다. 


런던 시내의 중심가인 옥스퍼드 스트리트와 토튼함 코트 로드 길가가 십자로 갈라지는 곳 북쪽이 런던에서 유명한 전자상가가 군집한 거리다. 런던 시내 남쪽에 살고 있던 시절에 나는 대학의 중앙도서관을 가기 위해서는 전철역에서 내려 그 길을 지나야 했다. 


어느 날인가 쇼윈도를 통해 한쪽 구석에 ‘SAMSUNG’ 로고가 선명한 텔레비전 한 대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이 뿌듯했다. 당시 공부에 열중해야 해서 TV를 시청할 여유가 없었지만 만일 구입하게 된다면 꼭 삼성 TV를 구입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네덜란드의 필립스사나 일본 소니와 도시바 제품이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삼성제품은 인지도나 제품 면에서 이들에 뒤지는 것으로 평가될 뿐 아니라 그것이 한국 제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았다.


나는 도서관에 가는 길이면 삼성 TV가 전시된 가게 앞으로 지나다니며 그 자리에서 전시되고 있던 텔레비전을 확인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애국자가 된 기분이었다.


마침내 몇 개월이 지난 후에 TV를 구입할 예정으로 가게를 방문했고 전시된 모델과 같은 제품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상점 점원은 마침 내가 구입하겠다는 삼성 TV는 전시된 것 한 대뿐인데 원하면 그것을 할인해 줄 테니 가져가거나 아니면 꽤 가격 차이가 나는 소니나 필립스 제품을 살 것을 권유했다. 


나는 애국심 반, 저렴한 가격 반의 유혹에 넘어가 전시하던 TV를 구입해 집으로 왔다. 문제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TV가 고장 난 것이다. 영국은 상거래 규칙이 철저해서 보증기간 내에서는 내가 원할 경우 100% 환불을 받거나 아니면 같은 모델로 교환이 가능했다.  


어차피 구입하기로 했으니 똑같은 모델로 교환을 요청했다. 

내 말에 상점 매니저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같은 모델로 교환은 불가능하니 환불받거나 혹시 다른 제품으로 구입할 의사가 있으면 차액만큼을 더 내면 된다는 거였다. 


전시된 거 말고 포장된 새 제품이 없냐는 내 말에 그가 말했다.

어느 날 양복을 입은 동양 남자가 와서 “거저 줄 테니 TV를 가게 전면 구석에라도 전시 겸 놔줄 수 없겠냐.”는 내용이었다.

가게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고객들에게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판매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게다가 거저 준다니 더욱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마침 내가 그것을 사겠다고 하니 전시도 적당히 했고 팔면 이익이 되는 터라 자신들로서는 기꺼이 판매한 거라고 설명을 했다. 지극히 실제적인 상인의 판매 술이었다.


지금은 더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소위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삼성에 입사하면 엘리트로 평가받으며 사회생활의 시작이 제법 잘 풀리는 경우였다. 게다가 회사 생활의 이력이 적당히 붙었을 무렵 해외지사에 발령을 받게 되면 엘리트 중에서 더 능력을 평가받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그중에서 런던지사로 간다는 것은 뉴욕이나 LA, 혹은 동경처럼 나름 회사 내에서 유능함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선발된 인물은 장래가 전도양양한 만큼 상당한 자부심을 느껴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선발된 우리나라의 엘리트 인재가 무거운 TV 박스를 싣고 다니면서 세일즈를 하며 상품 수출을 위해 애를 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컨대 거저 준다고 해도 영국 소비자에게 인지도가 없던 제품인 까닭에 상점에서 거절당한 게 한두 차례가 아니었을 거다. 그때마다 영어가 짧은 삼성맨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다음 가게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오늘날 삼성전자는 그런 역경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니 성장과정의 극히 일부를 목격한 입장에서 감회가 새롭다. 


이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의 한국이라는 나라를 설명하는 아주 작은 사례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당시 국가지도자는 시대를 읽을 줄 알았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런 여건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 무렵 한국은 아주 열악한 경제 여건 속에서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인간자원뿐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외국의 석학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이다. 발전한 다른 선진국들처럼 돈이 되는 천연자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산업구조는 기본조차 돼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 국가는 유일한 자산인 인간자원을 교육을 통해 꾸준히 개발해 가며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교육받은 자원은 국가나 기업 운영에, 그렇지 못한 자원들은 산업현장에서 적극 활용했다. 심지어 외국에서 외화를 버는 전략에도 활용했다. 


우리가 잘 아는 독일(당시는 서독)에 광부나 간호사로, 혹은 베트남의 전쟁터와 열사의 나라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떠나는 행렬에 참여하는 것조차 넘치는 인간자원으로 인해 늘 경쟁을 해야 했다. 


국가지도자의 전략은 성공했고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경제 강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수혜자에서 시혜자로 바뀌었고, 국가발전의 성공 신화는 세계가 모방하고 싶은 교과서적 사례가 되었다. 오늘을 사는 나이 든 기성세대는 이런 실체를 가능하게 한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자부심을 느껴 마땅하다. 


문제는 오늘의 현실이다. 

모 경제학자는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경제 침체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1960~80년대 한국경제의 성공은 선진국을 모방하는 경제운용방식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고 이제는 창의적 경제 운용이 필요한 시기인바 우리는 그런 창의적 사고를 하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는 교육제도로 인해 선진국 그룹과의 차이를 줄이지 못하고 경제와 산업이 미미한 수준이 되어 낮은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것이다.”


경제학자가 진단한 경제 침체의 분석이고 비전문가의 눈에도 공감이 되는 내용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후발 주자들이 우리를 포함한 경제선진국들의 경제운용방식을 모방하며 성장률 수치에서 드러나는 비약적인 경제적 도약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이런 주장이 근거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 번째로 결국 해답은 다시 인재의 양성인바 과거와는 다른 창의적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국가는 그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어장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경우 권위주의 사고에 몰입된 세대는 어쩌면 그들의 놀이에 방해꾼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방해꾼의 역할만 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 외국의 비슷한 세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취해낸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산업화 세대는 빈손과 맨몸으로 기술과 자본을 갖고 있던 또래의 선진국 사람들과 경쟁해서 승리를 거둔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한 세대다. 얼마나 위대한 승리인가. 따라서 그들의 족적과 경험은 언제든 다시 꺼내 쓸 수 있도록 매뉴얼화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국가지도자나 사회의 리더 그룹이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지금 새로운 국제질서의 시대는 환경, 테러, 지역주의, 종교 갈등, 지역분쟁 등의 심화로 다시 ‘힘(Power)’이 강조되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굴러 내려오고 있는 모습인 듯 보이지만 이것도 역사의 순환 원리에 따른 다른 새로운 시대의 도래이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힘의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힘은 총체적으로는 국력(National Power)을 말하지만 개별적으로는 경제력, 군사력, 문화적인 힘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며 이들 개별 요소들이 종종 상황에 따라 국가의 힘을 상징하는 어휘로 부상하곤 한다. 지도자는 이런 힘의 개별 요인들이 적절하게 활용 가능한 시점을 파악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냉전기와 달리 전통적인 경제력이나 군사력보다 문화적인 힘이 국력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문화강국이라는 말이 전 세계적으로 회자되었다. 과거에 하버드 대학의 조지프 나이 교수가 ‘하드파워’(Hard Power)와 ‘소프트파워’(Soft Power)로 구분한 이래 소프트파워의 기능은 한층 강화되고 확산되는 추세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고도 경직되거나 획일화되지 않고 유연한 사고로 판단하는 능력이 중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또 그런 인재가 국가경영에 나서서 국익을 놓고 국제사회의 지도자들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오늘의 우리를 살펴보자.

우리에게 과연 그런 지도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정부는 ‘운동권 정부’라 할 수 있다. 정부뿐만 아니라 여당도 운동권 경력이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들어가야 핵심인사가 되고 주류가 된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시위에 참가해서 최루탄 가루에 눈물 흘리지 않고 도서관에서 육법전서나 행정학 책을 읽으며 입신양명을 꿈꾸거나 해외에 유학이라도 갔던 사람들은 주류 운동권 정치인들이 백안시하는 대상이 되었다. 운동권 출신으로 정치인이 된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직접 확인한 것이니 뜬금없는 얘기도 아니다. 


그래도 과거 참여정부 인사들 중에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어서 비록 자신들이 국가경영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젊은 시절에 공부하지 않은 부족한 지식을 자성이라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은 과거에 괜히 양심 고백을 했다는 부끄러움 탓인지 핑곗거리만 무수한 뻔뻔한 위인들로 성장해 버렸다. 사람이 부끄러운 걸 모르게 되면 안하무인이 된다. 지금 저들의 행태가 그렇지 않은가.


이들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는 강성노조도 자신의 본분과 능력도 모르고 그저 투쟁을 빌미 삼아 반대급부를 얻어내는데 익숙한 집단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한국의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노조의 행태는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노동자 혁명을 촉구한 마르크스나 레닌조차 외면할 듯싶다.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 이들에게 시대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배부른 돼지에게 염불을 가르치는 것만큼 헛수고가 될 성싶다.


이들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이나 강성노조들에서 드러나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기질이나 성향, 그리고 능력상 스스로 창조해 내는 것에는 무능한 반면 기존의 것을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일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 참여정부의 정책 실패 사례들을 보라.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기업경영에 참여해서 월급을 주어본 경험도 또 열심히 일을 해서 월급을 받아본 전력도 드물다. 이런 희한한 전력이 그들 내부에서는 전통이 되었다. 


그러니 국가경영이나 정치에도 자신들의 약점인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것보다 ‘포퓰리즘’ 정책을 들고 나와 지지층을 확대하는 특기밖에는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도 종착역 앞에 다다르고 있는데 살펴보면 도대체 임기 내내 그들이 이룩한 생산적인 정책이 뭐가 있는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사소하거나 논의 중인 사안조차 부풀려서 앞서서 홍보를 하는데 익숙한 정부인데 매일 신문과 방송을 봐도 특별히 드러난 게 없다. G7의 자격을 논하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지금 이런 무능한 정부가 세상 어디에 또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원인이 과거 백 년, 이백 년 전 무렵 역사의 어디쯤부터 시작되었다면 잘잘못을 명확하게 판단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서 증언할 수 있다는데서 지금 정부의 과실과 무능을 지적하는 게 어렵지 않은 것이다.

 

외교는 외교대로 겉돌고 있고, 안보는 국가의 안위가 중요한 건지 38살짜리 북쪽 지도자의 안위가 더 중요한 건지 도무지 혼란스러우며 경제도 정부의 해당 책임자가 뻔뻔스럽게 목소리가 큰 거 말고는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방역도 국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 놓고 그것을 K-방역으로 홍보하는 몰염치에 어이가 없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도 과거 같으면 사과를 하고 책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어도 시원치 않은 상황에서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 가며 늘어놓는 변명을 보면 이런 후안무치가 세상에 따로 없다.


국제정치의 역사를 보면 종종 지도자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집권 기간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임기가 끝난 후에도 평생을 지지하고 따라올 거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어림없는 소리다. 백성의 인심은 물길을 따라 흐르다가도 굴곡진 계곡에 들어서면 역류하기도 하고 고였다가 댐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멀리 보지 않아도 동서양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그와 같은 굴곡의 삶을 살았다. 집권 기간 듣고 보면서도 백성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했던 일들로 인한 역사적 평가는 매서운 폭풍으로 다가온다. 


임기가 종착역 앞으로 다가가는 시점에 정부의 책임 있는 위인들이나 정치인들은 한 세대도 훨씬 전에 낯설고 말 설은 곳에서 무거운 TV 박스를 들고 전전하던, 독일의 광산과 병실에서 베트남의 정글에서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우리 국민들이 흘리던 눈물과 땀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까 모르겠다. 어디 그곳뿐이었겠는가. 


교묘한 말장난이나 하면서 국민들을 대표한다고 우롱하고 노동자 천국을 만들겠다며 서구 사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족 노조로 변신한 그들보다 빈손으로 이룩한 작은 가정이나마 온전히 지키기 위해 비바람과 외풍에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힘든 인생길을 묵묵히 견뎌온 국민들이 진짜 국가를 사랑하는 인물들이다. 온전한 국가라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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