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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Feb 28. 2022

노동자는 언제쯤 행복할까


며칠 동안 옆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SUV 차량을 제법 화려하게 개조한 3대의 차에서 종일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틀어댔다. 차량이 움직일 때는 번쩍거리는 불빛이 요란하다. 소음을 견디다 못해 항의를 했더니 한국노총 소속의 시위전담 무리들이 경찰에서 정한 허용치를 넘지 않았으므로 불법이 아니라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한다. 경찰에 신고를 했더니 시위 현장 맞은편에 경찰 차량이 있고 소음을 지켜보며 측정하고 있단다. 소음 측정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기준을 넘으면 단속할 양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답이 왔다.


공사장 바로 옆에 사는 내가 소음을 느껴 신고를 하는데도 애초에 데시벨 규정이 높게 책정되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소음으로 느끼는 수준은 아예 단속기준에 못 미친다고 한다. 세상에!! 성희롱도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정도에 의해 고발이 가능한데 노조에서 길가에 설치한 확성기 소음은 퇴교 길 엄마의 손을 잡고 가던 아이가 놀라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단속대상이 안된다니 기막힐 일이다. 법이 지켜지는데 시민들은 불편하다. 이런 역설이 있을까. 이건 온전히 정부가 비난받아 마땅하다. 시민들의 일상을 힘들고 불편하게 만들면서 법치국가를 운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튼 대단한 노동자 천국이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정치인이자 혁명가인 레닌(V. Lenin)이 주장한 ‘전위론(Vanguard Theory)’이라는 용어가 있다. 요약하면 결집되지 않은 단순한 다수의 노동자나 농민들만으로는 노동자 혁명의 성공이 어려운 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이들을 앞에서 이끌 소수의 주도 집단이 필요하며 이들을 전위그룹이라고 부르며 이런 논리를 전위론이라는 혁명 전술로 지칭하는 것이다. 


전위론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노동당이나 공산당이 탄생하고 공장에서는 전임 노조가 등장하거나 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 등장하는 이론적 바탕이 되었는바 지금 우리나라의 산업현장에서 일하지 않고 별도의 사무실에서 노조의 일에만 전념하는 전임 노조도 그 아류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임 노조 집단은 노동쟁의, 파업, 투쟁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골고루 활용해 가며 노사협상에서는 사측을 압박하면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운데 일반 노동자들에 앞서 야무지게 자신들의 이익도 착실히 챙긴다. 레닌이 그런 얄팍하고 파렴치한 방식을 언급한 적이 없으니 결국 요즘 ‘코로나19’의 변이 숙주들처럼 한국적 노조활동의 기이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미국이나 서유럽의 건전한 노동자 연합이나 노조들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부 강경 전임 노조의 불법적인 전횡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학위과정을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선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주에 4.5일제를 주장하는 노조가 반드시 생길 거라고 얘기하곤 했다. 당시는 토요일 근무조차 당연시 여기던 주 6일제 근무 시기였으니 많은 학생들이 내 예측을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이미 주 5일 근무제가 자리 잡고 있던 유럽에서 강성노조가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4.5일제를 주장하고 일부가 이를 받아들여 시행하고 있던 현실을 보고 온 터이니 나름 내 주장에 확신이 있었다. 


‘노사화합’이라는 말이 있다. 참 아름다운 말이다. 

비록 그들의 시선이 서로 너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사측의 생각은 늘 명확하다. 그들은 가능하면 적게 주고 많은 일을 시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저임금 노동자들로부터 높은 생산성이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착취’라는 개념이 우연히 등장한 게 아니다.


노동자들의 속내도 분명하다.

그들은 늘 적게 일하고 많이 받기를 원한다. 근무시간이 줄어도 임금은 유지되기를 바란다. 이들을 대표하는 노조는 이런 노동자의 욕망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투쟁 욕구를 적절히 자극하곤 한다. 


솔로몬의 지혜로도 이들의 입장을 조정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는 인간의 감정과 복잡한 경제논리, 그리고 시대 상황이라는 변수들이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충돌하게 마련이며 전임 노조원들은 사측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하고서도 붉은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결사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 뒤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자신들의 훌륭한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을 거다.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이며 힘 있는 기업주로부터 착취 대상이라는 생각에 젖어있는 노동자들은 과연 언제쯤이면 행복해할까.


1848년 만 30세의 나이에 자신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데올로기적 사상가로 만들어준 20여 쪽의 팸플릿 분량인 《공산당 선언, Communist Manifesto》을 통해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했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마르크스(K. Marx)는 생전에 노동자들이 만족할만한 삶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


“노동자는,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천천히 인근의 냇가로 나가 낚싯줄을 드리우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평화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점심 무렵에는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공장으로 출근해서 자신의 가치 있는 자산인 노동력을 제공하며 오후 시간 동안 일을 한다. 평화로운 삶에 방해가 되는 잔업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따뜻한 저녁 식사를 마친다. 그런 후에는 서재에 올라가 ‘플라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그런 일상이 바람직한 노동자의 삶이다.”

 (요즘 같으면 플라톤을 읽는 대신 넷플릭스를 시청하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희망은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지 17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요원하다.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M. Keynes)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1930년에 《우리 후손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1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은 일주일에 15시간을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결국 하루 3시간 근무를 주장한 것이니 자신보다 80년 전쯤 마르크스의 ‘하루에 반나절 노동’ 주장을 의식했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OECD 국가 중 독일은 주당 35시간으로 노동자의 근로 시간이 가장 짧다. 


이런 형편이니 좌파 노동운동가들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마르크스나 케인즈의 예언이 실현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예언이 성취될 때까지 노조의 손에 이끌려 투쟁을 지속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들에게 파업투쟁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AI가 노동을 대신하고 그 결과 노동력의 감소는 필연적이며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분야를 개척하려는 지식의 무장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전임 노조는 노조원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을까. (그런 세상의 흐름을 투쟁 전문가들이 이해하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오래전에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한 혁명’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자신들의 손에 있으므로 공장이 문을 닫지 않는 한 자신들의 지위도 늘 굳건할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다. 


지금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국민들은 일상의 자유조차 속박당하고 자영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강성노조의 행태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집회나 시위에 나선 그들은 너무나 당당하다. 노동자들을 지지 세력으로 의식한 집권 정부가 노조의 불법적인 행태를 용인하고 있으므로 선거까지 목전에 둔 이 기회에 요구를 관철시켜 잔뜩 얻어내자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있을 거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은 법을 준수하며 명예를 존중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에 우선하는가 보다. 


이들의 권력은 지속될까.


집권 노동당의 지원 아래 1960~80년대 무소불위의 힘을 내세우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던 스카길(Arthur Scargill)이 이끄는 탄광노조로 대표되는 영국의 강성노조는 결국 1976년 IMF의 경제위기를 초래했고 사회를 분열시켰다. 그 결과 노조에 끌려 다니며 실정을 거듭한 노동당 정권은 물러나게 되었고 탄광노조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 보수당 ‘철의 여인’ 대처(M. Thatcher) 총리의 강력한 조치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강성노조의 이기적 행태가 가져온 결과는 흔히 ‘영국병(British disease)’이라고 불리는 영국 사회의 혼란과 경제의 쇠퇴였다.


나는 대한민국의 노동자나 기업 모두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현실을 보며 그런 인간적인 소망의 성취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몸집이 큰 재벌기업들의 기업 운영은 여전히 과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은 노동자들의 가치를 늘 이윤과 연결시켜 판단하는 경제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그들은 중소기업과의 협업과 상생 대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과 경쟁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며 그들이 땀 흘리며 이루어놓은 기술과 이익을 빼앗으려는 생각에 골몰한다. 이런 여건 속에서 건설적인 경쟁과 협업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지금 기업은 국내는 물론 해외의 기업들과 무한경쟁을 해야 하고 노동자들도 사측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해외의 노동자들과 생산성이라는 목표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시대다. 이런 여건 속에서 노동운동의 수단과 절차, 그리고 목표의 설정이라는 측면에서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노동자의 권리를 위임받아 경영하는 전임 노조가 세상을 보는 지식이 부족하고 행위에서 상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독선으로 흐르는 현재의 행태를 지속한다면 결과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마르크스는 죽을 때까지 노동자 혁명을 위해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했지만 나는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전임 노조 간부들이 각성하고 자성할 것을 촉구하라고 권하고 싶다. 17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마르크스가 주장한 폭력혁명에 집착하며 세상의 변화를 도외시하는 강성 전임 노조의 무능한 행태에서 패거리 의식의 고취와 국민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 외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지금 강성노조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마르크스는 그나마 여가를 즐기고 지식을 함양해야 하는 등 노동자들의 이상적인 삶에 대한 목표를 제시라도 했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부딪치는 노조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기심만 충족시키려는 몰염치와 안하무인격 행태 이외에는 보여주는 것이 없다. 이런 방식이라면 노동자들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이 오기는 하겠는가. 자신들만의 집단이익을 위해 시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파괴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강성노조의 행태를 딱하게 바라보다가 심드렁해져서 노동운동의 단편을 잠시 회고해 보았다. 과격한 투쟁을 통한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투쟁보다 노동자들의 삶의 질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내용이 아닐까.



(편의상 근로자와 노동자 등을 총칭해서 노동자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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