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은 칼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싸움이다.
근거를 가지고 논쟁하며 상대방의 합리적 근거에 대해서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하고만 논쟁을 벌여야 한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요즘 TV를 보면 가히 여성들의 전성시대임을 실감한다. 남자들의 권위와 존재감은 어느새 추락해서 남자들이 여성들의 그림자를 뒤쫓아 다니는 형국이다. 종편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방송에서도 참석한 남녀 패널들 모두가 남자들의 권위 추락 현상을 조소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이 같은 풍조가 그동안 상대적으로 왜곡되었던 여성의 지위가 비로소 균형점을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귀가 아프도록 떠들고 있다. 남녀관계는 과연 제로섬 게임인가? 노년의 생활설계 전문가라는 어떤 이는 나이가 들면서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분 설명하면서,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에 남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기의 상황을 박장대소하는 100퍼센트 여성 방청객들과 소통한다며 떠들어댄다.
그는 항간에 떠도는 얘기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자들은 친구, 돈, 건강, 여행, 자식들이 필요하지만 불쌍한 남자들은 아내, 부인, 처, 집사람, 마누라와 애들 엄마가 필요하다고 소개한다. 여성들이 웃고 즐길만한 발언이다. 전문가의 주장이고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터이니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 남자들은 살아가기 위해 그토록 ‘절실하고도 절박한 필요인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뜻인가. 농담하며 웃고 즐기자는 프로그램이니 너무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남자들의 처지가 이토록 희화화 되어버렸나. 무엇이 현대를 살아가는 남자 - 여전히 한 가정의 가장이자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되는 전쟁터에서 매일 상처 입으며 목숨을 걸고 전투를 수행해 온 - 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고 있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정 수준 민주화와 경제적 부를 일궈낸 국가들 - 기본적인 의식주의 절박함이 어느 정도 해결된 - 에서 남성성의 추락에 대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들이 있다. 사회 전반에 남녀평등의 기본적 인식이 보편화된 시점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미디어의 역할이 그것이다. 추락한 남성의 역할과 미디어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들은 남성성의 추락에 어떤 책임이 있는가. 관찰해보면 그들의 책임이 없다고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는 미디어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방송매체는 시청률에 목을 맨다. 광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광고수입은 언론계 종사자로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과도 연결된다. 자신들 존재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시청률의 평가는 시청자들의 선호도에 달려있다. 오늘날 시청률과 아주 밀접한 TV의 주된 시청자는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따라서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주된 고객인 여성들의 눈을 붙잡아 두기 위해 그들의 기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여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의 기호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을 인내심을 갖고 시청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직업적으로나 관심으로 보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시사나 국제정세 문제에 관심이 없다. 연예나 오락, 가사와 육아, 그리고 소소한 재미를 주는 드라마와 토크쇼가 그들을 붙잡아 두는 주된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자신에게 군림하려 하고 지성보다는 야성, 섬세하기보다는 투박한 문제덩어리인 – 어쩌다 이들과 지구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인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 가장이자 남편인, 그리고 인구의 반인 남성들과 관련된 그들의 한심한 스토리를 보면서 저절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프로그램을 마다할 리가 없다. 여기에 미디어가 조작해낸 오늘날 남성성의 추락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미디어는 드라마, 시트콤, 광고 등에서 남성들을 끊임없이 희화화하며 이미지 추락에 몰두해 왔다.
앓아 누워있는 아내를 대신해 갑자기 집안일을 맡게 된 남편의 허둥대는 모습, 세탁기 사용과 설거지조차 제대로 못하는 쓸모없는 얼간이로서의 남편.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조차 찾아먹을 줄 모르는 답답한 위인으로서 남편,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 사료도 구분할 줄 모르는 무지한 남편.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한 택배기사보다도 무심한 남편. 아이들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아이는 몇 학년인지, 담임선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채 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가 결과를 놓고는 고함밖에 칠 줄 모르는 남편, 집안의 대소사에 관해, 특히 처가 쪽에 대해서는 마치 고아로 성장한 사람처럼 태도를 보이는 남편..
오늘날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 남자들의 현주소다. 남자들의 이런 모습들을 보여주며 프로그램은 여자들이 현명하고 섬세하며 전 방위적 사고를 할 줄 아는 가정주부이자 아내라는 점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며 TV앞에 시청률 상승에 기여하는 여성들을 붙잡아 둔다.
드라마 작가들 대부분이 여성들로 구성된 것도 프로그램이 성 균형화를 방해하는 장애가 된다. 물론 드라마나 시트콤 작가가 되는 길에 남자들에게 넘지 못할 특별한 장벽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의 성격상 이는 자수 놓기 경연대회에 왜 남자들이 참가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남자들이 고층건물이나 철탑 공사장에 왜 여자들이 일하러 오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드라마나 시트콤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섬세함과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감동을 주는 꾸밈을 만드는 재주가 천성적으로 부족하다. 주 시청자인 여성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에 부응하며 대처하는 능력이 여성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이런 현실을 놓고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라고 여성들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남성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기호와 장점만을 살려 아파트 단지를 축구장처럼 건축하고, 건물 곳곳에 음주와 가무가 항시 가능한 은밀한 공간을 지어 놓으며, 마당에는 자연산 지렁이들이 스멀대고 눈앞에서 개구리와 메뚜기가 뛰고 날아다니는 자연친화적인 풀밭을 만들어 놓고 여자들에게 ‘어서와 같이 뛰어놀자’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 같은 TV 프로그램의 왜곡된 현실의 반복은 결국 남자들이 TV를 등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는 또 방송사로 하여금 남은 충성된 시청자들이라도 붙잡아두려 애를 쓰게 만든다. 왜곡이 현실을 반복해서 왜곡되게 하는 것이다. 오래전 국영방송의 주말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늘 상대 여성의 심기를 살피며 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코너가 있다. 남자 주인공은 늘 O와 X, 혹은 제3의 답을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하며 여자와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나 결과는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하던 여자는 늘 그 선택에 대해 질책을 한다. 코미디 프로그램이니 만큼 그저 웃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이런 현상이 사회에, 남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미디어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성들에게 남자들은 나쁘다거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세뇌를 해왔다. 이제까지 우리가 본 드라마 불륜장면에서도 잘못은 늘 남자의 몫이다. 비극적 결말에 대한 하늘의 심판도 늘 남자를 향한다. 거기에 비해 여자들은 늘 남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고 유혹에 빠지고 가냘픈 존재로 부각되어 왔다. 1974년에 만들어진 지금은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 한 ‘별들의 고향’에서 여주인공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대사는 지금도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로 종종 이용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밝고 명랑했던 여주인공은 첫사랑에게는 버림받고 후처로 들어가 만난 두 번째 남자로부터도 과거가 드러나 내쫓긴다. 세 번째 만난 남자로부터는 배신당하고 마침내 만난 마지막 남자와도 헤어지며 눈 내리는 겨울밤에 길거리에서 발견되면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반세기 전인 1970년대의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시대상황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TV에서 방영되는 멜로드라마의 정형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남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여주인공은 여전히 버림받고 내쫒기고 있다. 드라마일망정 부부사이에서 악한 역할은 늘 남자의 몫이고 남자 주인공은 ‘갑질’해 대는 태도로 인해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비록 드라마일망정 못된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남자를 출산하고 양육한 어머니가 알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여자가 여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조차 여자는 늘 남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왜곡된 현실은 남자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근거 없는 편견으로 자리 잡았고, 남자들은 그런 편견에 분노하고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남성들은 이렇듯 미디어의 왜곡된 장난질의 희생양이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 이 같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가 종종 뉴스를 장식한다. 전혀 모르는 여성에 대한 남자의 무차별 폭력과 살인, 이에 대응하는 여성단체들의 분노의 시위, 강력해진 여권을 계기로 더 이상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의 등장,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또 다른 적개심. 남성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이런 현실을 여성들은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11년에 대한민국에 성 평등을 주장하며 등장한 ‘극단적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성연대가 출범했다. 이들은 일반 여성들의 객관적인 주장과 달리 “여성을 보호와 배려가 필요한 대상으로 전제하고 각종 불필요한 특혜를 남발하는 극단적 페미니즘” 단체의 주장을 반박한다. 남성연대는 우리 사회에 지나치게 ‘여성’을 강조하는 정책과 단체들 - 여성친화도시 지정, 여성 새로일하기센터 창립, 여대생 커리어개발, 여성인재아카데미 설립, 국제전문여성인턴제도 시행, 지하철 여성칸 지정, 정치와 공직분야에서 여성할당제, 심지어 여성가족부 - 이 불필요하게 성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들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들에 대한 성차별과 성 불평등 문제를 놓고 시위를 지속하면서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왜곡된 남성성의 추락은 이제 모두의 예상을 비켜나 우리 사회의 남녀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깊어지는 남녀 간 갈등과 충돌의 현실을 놓고 이제는 문제를 극복할 해법을 미디어가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