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3월 1일 일요일
추웠던 겨울을 지나 마침내 봄기운이 서서히 번지고
다음 날은 공휴일이어서 일상의 스트레스와 번뇌에서 다소 자유로워진 사람들의 얼굴에선
설렘과 여유로움이 가득 피어오르던 때
그리고 그것이 화사한 색깔과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던 때
저에겐 봄처럼 지옥이 찾아왔습니다
그 날 엄마와 전 이혼 전문 변호사와 상담하러 강남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눈치채지 못하게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전날 밤부터 어디냐고 계속 오던 아빠의 카톡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빠는 갑자기 이상한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야?"
"어디야?"
"어디야?"
"어디야?"
...
"지금 안 받으면 실종 신고 할 거야"
"지금 안 받으면 실종 신고 할 거야"
...
"마지막이니까 카톡 받아"
"마지막이니까 전화 받아"
마지막?
뭐가 마지막이지?
5년 전에도 엄마는 아빠에게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빠가 마지막을 운운하니 지레 겁을 먹은 엄마는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엄마에게 아빠의 연락을 절대 받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궁지에 몰리자 상대방도 수렁에 끌어들이려는 계략,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아빠가 보낸 카톡은 더욱 소름이 끼쳤습니다
엄마가 최근에 사준 새옷을 입고 본인의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럭저럭 봐줄만하지 않아?"
엄마는 아빠의 그 카톡으로 정신이 무너져버렸습니다
모든 걸 멈추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강남 한복판에 덩그러이 서있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데
저 혼자만 지옥이었습니다
밝고, 환하고, 가벼운 주변의 풍경은
어둡고, 강렬하고, 복잡한 제 내면과 대비되어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날 저는 세상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고립되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지옥은 마치 '점'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넓은 세상 속에 있어도,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시야와 감각이 한 지점으로 수축되어 버리는 것.
밖에서는 이어져 있던 시간과 공간도 끊어지고, 오직 그 고통의 중심에만 붙들린 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지옥은 어떤 거대한 장소라기보다 도망칠 수 없이 고정된 하나의 점에 갇힌 상태가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지옥에 있습니다
밖을 보니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려져 있군요
언제야 제 마음에도 완연한 봄이 찾아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