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도 있다. 늘 똑같아 보이는 풍경이 어느 순간 ‘확’ 바뀐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변화는 정말 ‘확’ 바뀐 게 아닌, 우리가 보이지 않은 곳에서, 시나브로 스며들었기에 가능했다. ‘국악’도 그렇다.
흔히 ‘전통음악’으로도 불리는 국악은 고루하고 무미하다는 인식이 있다. 그것은 신비하면서도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종묘제례악, 수제천, 산조, 농악 등 느리거나 추상적이기에 오늘날 가요에 비해 더욱 큰 괴리감이 느껴진다. 판소리나 민요는 비록 가사가 있다 하더라도 시대가 변하여 옛말과 한자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고, 같은 이유로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은 그것이 왜 웃기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도 이전에는 김덕수 등이 농악을 실내무대에 맞게 꾸민 ‘사물놀이’, 박동진 명창이 유행시킨 ‘완창 판소리’,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침향무>와 <미궁> 같은 레퍼토리는 간간히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환호를 받았다.
그래도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던, 대중과 거리감이 있다는 국악의 한계점은 예술가들이 극복해야 할 골칫거리였다. 사실 내부에서는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충돌해도 늘 ‘전통을 계승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위계질서가 뚜렷한 국악계에서 원로들이 느끼기에 파격적이고 새로운 시도는 일종의 이단이자 불편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서만 소극적인 시도를 했다. 그나마도 김덕수, 황병기, 원일, 국립창극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 같이 음악이나 레퍼토리가 아닌 사람과 국립단체에 기댄, 잠깐 뜸 들이던 밥에서 김이나 빼는 수준에 그쳤다. 즉, 국악을 전공한 예술가들 앞에는 전통을 따르되 혁신적이며 대중에게 사랑받는 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된 강박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도 저도 아닌, 장르가 불분명한 음악만 던져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족쇄를 벗어나고픈 욕망이었을까. 오늘날에는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 타는, 그러나 명확한 지향점을 가진 그룹들이 많이 생겨났다. 수궁가를 각색한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이날치’와 남도음악의 주요 레퍼토리를 편집해 선보이는 ‘바라지’를 예로 들 수 있다. 지금 이야기할 ‘악단광칠’ 역시 전통을 세상에 맞춰 재해석하고 음악 색이 뚜렷한 그룹이다. 이들은 성악(판소리와 민요) 전공자 세 명과 가야금, 아쟁, 피리(생황 겸), 대금, 타악 연주자 두 명으로 이뤄진 그룹이다. 온스테이지 조회수 123만 회(21.06.08. 유튜브 기준)를 달성하고, 김어준이 진행하는 TBS ‘뉴스공장’과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며 팬층을 형성했다. 현재에는 ‘이날치’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국악그룹이 아닌가 싶다.
내가 보기엔 이러한 편성은 흔하고, 기존의 곡을 각색한 그룹은 많디 많다. 그렇다면 어떤 매력점이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을까. 우선적으로 귀에 딱 들어오는 특징은 음악이 대부분(1~2개를 빼놓고) 경쾌하다는 점이다. 단순히 가락(멜로디)이 경쾌한 것을 넘어 노래가 담고 있는 내용들도 희극적이고 해학과 위트가 넘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느리고 재미없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국악은 확실하게 귀를 때릴 수 있는 음색과 가락을 가지고 있어야지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를 깨부수는 방법으로 존재를 어필한다는 점이다. 이 한계점, 국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한계점을 ‘악단광칠’은 다른 그룹들과 다르게 건반이나 베이스, 일렉기타 같은 현대 음악의 필수적인 악기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국악기만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여러 국악그룹 가운데 ‘악단광칠’은 현대적 감성과 전통을 잘 버무려낸 그룹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은 본래 있던 곡의 가사를 그대로 차용하거나 짧게 편집하고 가락만 서양 악기를 삽입해 트렌디하게 바꾸는 게 그쳤다. 그 가사는 최소 조선 후기부터 내려오던, 지금 우리가 들으면 감정적으로 괴리가 생기는, 이해가 어려운 것들이다. 똑같은 사랑 노래도 동일하다. 국어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수동적이고 관습에 사로 잡힌 사랑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악단광칠’은 <맞이를 가요>와 <밤중에>에서 사랑을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하는, 성공하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위트 있게 풀어내고 있다. 예쁘고 잘생긴 아이돌이 나와 ‘너무 인기가 많아서 어쩌지’ 혹은 ‘널 좋아하는 날 좀 봐주세요’ 같은 투정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만한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우리네 사랑을 이야기한다. <와대버(whatever를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에서는 경기민요 <는실타령>의 특이한 후렴구를 가져와 꼴찌 한 성적표를 받은 일, 퇴근 시간에 일을 시켜 야근하게 된 상황 등 일상의 이야기를 방방 뛰는 가락 위에서 해학으로 비틀었다.
결국 ‘악단광칠’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우리 삶을 이야기하는, 과거의 ‘민요’와 닮았다는 점이다. ‘민요’가 그 시대 민중의 사랑과 아픔, 생활을 이야기했듯이 21세기 한국에 맞춘 민요를 만들었기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춤 역시 뭇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우리가 흔히 ‘춤’이라고 말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긴 장삼 흩날리는 승무? 얇은 다리 한쪽으로 빙글빙글 도는 발레? 유명한 아이돌의 칼군무? 무엇이 되었든 ‘악단광칠’ 춤에 못 따라갈 것이다. 막춤 같은 쉽고 간단하되 노래 가락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독특한 춤사위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흔한 춤’이다. 회식자리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 가면 나오는 상사의 몸짓, MT에 가서 우리도 모르게 노래에 맞춰 흔들고 있는 그 몸짓을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보여준다. 비록 완벽한 칼군무는 아닐지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을 수 있고, 따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악단광칠’의 춤이다.
이들은 어려운 얘기를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치한 가사나 나열하며 트렌디하다고 자위하지도 않는다. 이런 간편하고도 공감하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악단광칠’의 정체성이자
매력이다. 우리 것이지만 낯설고 신비한 국악의 가락에서 우리 삶이 느껴진다.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시시콜콜한 잔소리나 입바른 소리가 아닌, 나의 이야기 말이다. 내가 느낀 즐거움과 슬픔을 ‘악단광칠’은 흥겨운 가락으로 풀어내 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 진정한 ‘민요’를 만들어낸 ‘악단광칠’,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