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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Apr 09. 2023

우리는 모두 방랑자

<겨울나그네, 빌헬름 뮐러>를 읽고

 빌헬름 뮐러(1794-1827, 33세)는 20대 초반에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20대 후반에 [겨울 나그네]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후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 31세)가 가곡을 만들었죠.


 이 시집을 읽고 4시간 동안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얻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시를 개인적으로 읽느냐 시대적으로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더라고요. 두 번째는 함축적이고 정보량이 적다 보니 왠지 비슷한 시가 인상적일 것 같지만 정말 다 다르다는 거였죠. 이 두 가지를 지금부터 조금 상세히 얘기해 볼게요.


개인적으로 읽기


 색깔 표현에 대한 이야기, 의성어의 적절한 배치와 재미, 가곡과 연결 지어 들어보면 개인의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저는 똑같은 시를 읽었는데 왜 색깔과 의성어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인지 새삼 새롭네요. 그리고 아쉽게도 가곡을 다 들어보진 못했지만 듣고 오신 분들이 불러주시기도 하는 걸 듣기도 했어요. 전 혼자서 시집 한 권을 읽었는데 10명이 넘는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 보니 시집을 10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Tip을 얻을 수 있었어요.


'질투와 자존심'에서는 마음에 틈이 없이 질투로 꽉 들어찬 공간을 표현하듯이 나뉘지 않고 쭉 시가 써져 있어요. 게다가 가곡을 들어봐도 거의 랩처럼 들리는 것이 쉬는 마디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더라고요. 연작시이기 때문에 마치 드라마나 뮤지컬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시끼리의 차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거더라고요.


 시에서는 짧은 글로 이야기를 풀어놓기 때문에 마음에 와닿는 표현을 많이 수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네가 내 눈물이 뜨거워짐을 느낄 때,
그곳에 내 연인의 집이 있는 거야.

'넘쳐흐르는 눈물' 중에서


 요람을 죽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정도로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였지만 그저 잠들었을 뿐이니 혹은 잠깐 방황할 수 있으니 그저 자게 내버려두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됐어요.

 결국 젊은이는 일어나서 다시 꿈과 같은 현실을 살 거라고 기대나 희망을 가지고 싶어 져요.

잠든 젊은이의 꿈을 방해하지 마라

'시냇물의 자장가' 중에서

시대적으로 읽기


 1820년대를 앞뒤로 살펴볼게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국가를 이끌던 지배계층의 위기감이 고조되어 상호견제하면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도록 1818년부터 1848년까지 빈체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현체제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 것을 내세워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시대적으로 읽히는 이유 중 하나는 최근에 연달아 읽고 있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에서 '시인과 혁명'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직 읽지 않았지만 <시인의 죽음, 다이 호우잉>이라는 작품도 알게 되면서 시인의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졌어요.


 시인은 그 당시에 교육받은 사회 내에서 지배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중에 사회적 변화에 대한 통각세포가 발달해 있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겠죠. 사회적인 혁명 측면에서는 얼핏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혁명에도 시인이 적합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의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인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에 틈을 만들고 경계 지어진 것들을 허물어 버리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른과 어린아이의 경계나 물질과 생각의 경계나 여자와 남자의 경계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요.


 뮐러는 아이들에게 춤곡과 노래를 시를 통해 전달했다면 그에 발맞춰 슈베르트가 노래를 만들어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마지막에 '거리의 악사'로 연작시가 끝이 나는데 여전히 얼음 위에 서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지거든요. 아마도 절망적인 와중에 희망을 놓지 않으려던 뮐러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물가에서 갈대 피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멋진 춤곡과 노래를 들려주고 있어요>

'질투와 자존심' 중에서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거리의 악사' 중에서

(이 부분은 모임 하기 전에 작성했던 독후감이에요. 모임 전후의 차이를 확인해 보시라고 그대로 적어놓아요ㅎ)


 책을 읽기 전부터 시집이기 때문에 엄청난 시련이 닥칠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역시나 예상대로 시는 아직도 저에게 넘어야 할 거대한 산입니다. 요즘에 조금씩이라도 읽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힘들고 아마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그나마 이해가 가능할 거 같아요. 시가 저에게 힘든 이유는 찾았습니다. 다행이죠. 바로 은유, 메타포가 익숙하지 않고 제 사고방식이 은유와 친하지 않아서 그래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렇게 얘기해 주는 것이 편한데 은유라뇨..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는데 희망을 가집니다. 교육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 말이에요.


 사실 그런 의미에서 낭만주의가 아마도 저와 가장 먼 사조가 아닐까 해요. 계몽주의의 이성적인 사고방식이 왠지 편안하기 때문이죠.


 많은 시 가운데 유독 하나의 시가 눈에 띄었는데 '이정표'를 적어봤습니다. 거대한 사회 안에 한 개인에 집중하는 것과 그 개인의 개성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의 제가 떠오른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떤 어리석은 열망을 가진 채 황야를 헤매고 있는 건지 가끔 궁금하거든요. 그렇게 끝없이 방랑하면서 안식 따위 없이 저한테만 보이는 이정표를 따라가고 있어요. 다른 분들도 같은 느낌인지 궁금하네요. 유난히 이 시가 좋은 걸 보면 요즘 제가 방랑을 하고 있나 봅니다. 모임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저는 살면서 방랑이 기본값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정착이라는 것이 아주 잠깐이고 매번 그다음 장소를 찾고 방랑하고 잠깐 앉아있다가 떠나는 느낌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적고 무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요.


이정표


왜 나는 다른 방랑자들이 다니는

큰길들을 피해,

눈 덮인 바위 벼랑 사이로 난

은밀한 오솔길을 찾아가는가?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만한

나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그 어떤 어리석은 열망 때문에

황야를 헤매는 걸까?


길가마다 이정표들이 서서

마을로 가는 길을 알려주지만,

나는 이렇게 끝없이 방랑하면서,

쉬지 않고, 안식을 찾아 헤맨다.


나의 눈앞에 이정표 하나가

꼼짝 않고 서 있는 게 보인다

나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돌아온 사람 아무도 없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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