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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Apr 05. 2023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를 읽고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성과 책임, 자기결정 능력이다. p.75

 삶의 시작인 출생신고와 삶의 마지막인 사망신고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은 것 같다는 독서모임 멤버의 이야기로 포문을 열고 싶어요. 스스로 책임지고 자율적이며 자기결정 능력을 가지게 되기 전부터 삶은 시작됐죠.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시작했던 때와 비슷하게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여러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하는 사람들은 삶을 시작하게도 만들고 어쩌면 죽음도 결정짓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신고서에 적어야 하는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자신의 삶과 죽음보다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만 해도 출생신고서에 적은 아이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며 부모님과 조부모님에 대한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삶은 누구의 것이지 생각해 봤을 때 삶을 시작하게 만들어준 사람과 삶을 시작하는 당사자의 것, 그리고 그 삶을 살도록 하는 사회의 것이겠죠. 생각해 보면 어떤 물건도 온전히 내 것인 게 없네요. 물건의 시작은 다른 사람의 손이었고 사용은 내가 하지만 마지막 쓰레기통 이후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게 됩니다. 그럼 죽음은 누구의 것일까요.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은 누구의 것인지 생각해 보기 전에 죽음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에 대해 얘기해 봐요. 바로 현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문제를 인식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의학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그저 죽음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 중 하나이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섭리였겠죠. 지금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돈을 통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내 질병에 맞춘 신약이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삶의 존엄성을 떠나 죽음이 조금 늦게 찾아올 수 있도록 지연시키는 능력이 생겼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교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차단을 한 교리가 대세를 이루었잖아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이 다른 나라에서 이해하기 힘든 전략이었다는 것을 보면 죽음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질문은 한 개인이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p.232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중에서


죽음을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어떻게 결정되는가


 죽음에 임박했다고 결정하는 사람들은 지금은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예전에는 스스로 죽음에 대해 느꼈을 것 같아요. 동물들도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죽은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집을 나가는 반려동물들이 있다고 하니까요. 아마도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객관적인 수치에 근거해 죽음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려주고 시한부 판정을 하면 그에 맞는 의학적 조치나 연명치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각 개인이 의사들의 판정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건강검진을 통해 관리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죽음이라는 현상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어야 하는데 의사나 사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결국 죽음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 역시 인권이라는 것이다. p.72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하는 말에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거죠. 지금의 사회가 인간에게 준 권리이지만 그 사회 내에서 문제가 없는 선에서의 권리라는 겁니다.

 인권이란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지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한 존재로서 생래적‧천부적 인권을 갖습니다.

 사실 인권의 정의를 보면 모호하다고 느껴지더라고요. 이 책을 보면 존엄성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지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특정한 어휘에 대한 판단도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논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죽음을 앞둔 당사자의 입장, 가족이 기대하는 바, 사회가 생각하는 시각은 서로 다를 것이다. 각각 다른 시각들을 어떻게 묶을 것인가. 이를 합의하는 과정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를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p.280


 존엄한 죽음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죽음은 두렵고 논의하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회피하려고 하잖아요. 그 와중에 어떤 죽음이 가장 존엄하고 좋은 죽음인지 예쁘게 포장하려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가족, 학교, 회사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시대에 존엄한 죽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의 시작부터 끝을 생각해 봤을 때 시작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며 끝 또한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그 권한이 넘어간다는 점에서 존엄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죽음의 주체는 죽음까지의 과정에서의 존엄성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죽음의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 존엄한 죽음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죽음 이후에는 누군가가 죽음의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이때까지 존엄한 죽음을 유지하려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정확한 지시사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있다 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확률이 큽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무리 짓는 사람이 생각하는 존엄성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렇게 존엄한 죽음이라는 과정이나 결과는 주체가 변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논의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죽음 전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고 생각을 교환하는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는 겁니다.

 결국 존엄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죽음인지 등 많은 것이 논의가 되고 합의가 이루어져야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죽음의 소유권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는 곳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 몸이 될 수 있겠죠. 혹은 몸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 몸은 크게 보면 지구에 속해있는 것이잖아요. 지금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동물의 죽음이 단순히 동물들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기 때문에 멸종위기종과 같은 이름을 붙여 보호하고 있기도 하죠.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한 현대에 위기를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저출산과 존엄사를 선택해야만 하는 현상이 자꾸만 화두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가설을 만들어봅니다. 물론 억지로 껴맞춘 것일 수 있지만 가설이란 것이 원래 그런 거잖아요. 존엄사를 찬성하고 그것이 법제화된다면 노인 인구 탈락을 위한 악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 가설이 생각났어요.


 많은 문제의 시작은 인구가 밀집되어 생겨나는 것부터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죠. 인간들이 생존본능으로 밀집된 환경에서 살아가기 힘드니까 혼자 외롭게 사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이에요.


언제부턴가 노인 스스로가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요양원이나 양로원에 내는 돈이 커서 경제적 비용을 생각하면 조력자살을 하는 게 부담이 없는 게 사실이다. 이런 요인으로 조력자살을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p.65


개인의 자율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스위스에서 법은 최소한의 원칙만을 정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허용하는 서회 문화적 분위기가 강하다. p.83


'애티튜드' 문화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즉 진실로 사람을 돌보는 의사, 환자의 삶 전체를 돌보는 의료인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연명의료 중단이나 임종 돌봄 같은 시스템만 갖고 변화를 추구하고 논의를 진전시키기엔 역부족이 될 것이다. p.273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 하면 첫 번째 고통이 없어야 한다. 두 번째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족이나 자신에게 부담되지 않는 죽음. 마지막으로 살아오면서 지켜온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잘 정리해서 나누고 떠나는 죽음. 물질적인 재산을 남기는 것뿐 아니라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을 기록하고 나눠줄 수 있어야 인간의 존엄한 존재적 가치가 지켜진다.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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