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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Aug 09. 2023

가난 탈출 신화로 눈이 멀다

<빈곤과정>을 읽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문제의 당사자인가 아닌가


 여성, 장애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개념 중에 하나는 당사자성입니다. 이 문제의 당사자인가 아닌가를 이야기하면서 이야기할 자격을 두고 논쟁을 합니다. 당사자인지 아닌지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당사자만 이야기할 경우에는 목소리도 너무 작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제에 둔다는 점이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느껴집니다. 반대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사실 적절하게 당사자와 당사자가 아니지만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같이 문제해결에 대한 의지만 있다면 목소리를 높여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이 책과 영화가 딱 그에 맞는 예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의 저자도 그렇고 영화감독은 모두 빈곤의 당사자는 아닙니다(제가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혹시나 빈곤의 당사자인데 제가 잘 몰랐던 거라면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실제 빈곤의 당사자는 글을 쓸 여력도 안될뿐더러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여력은 더욱 불가능할 겁니다. 이런 현실에서 빈곤을 미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성공하는 현상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약자가 아닌데 약자로 만들기도 하고 없는 강자를 만들어 서로 싸우게 전쟁터를 만들어놓고 정작 설계자는 이익만 취하고 빠져버려 진흙탕 싸움을 만들어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문제의 논점을 흐려놓고 결국 문제는 해결될 수 없게 만들어 놓는 거죠.


 이후 모임을 하면서 '문화인류학'에 대한 학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결론을 내기 위해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주제를 콜라주 형태의 책이 나오게 된 거 같아요. 대부분의 학문은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과학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형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태에서 벗어나 목적성을 두지 않고 학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나 책을 읽는 게 어떤 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문화인류학 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가난을 도둑질하고 싶은 목적


 가난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면 약자 그룹에 소속이 될 수 있고 그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클수록 약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자극적인 선동을 할 수 있는 이슈가 꽤 많죠.

 정치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고 느껴집니다. 어딘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사회적인 기준으로 가난하지 않은데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꽤나 높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냥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봐도 '가난'이라는 단어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생각보다 말이나 단어의 힘이 강해서 스스로 '가난'이라는 단어를 말하게 되면 진짜로 믿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거든요. 아무래도 성공의 반대말을 '가난'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스스로 성공의 기준을 세워놓고 달성하기 전까지 가난 코스프레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온라인 공론장에서 가난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이 곧잘 소환된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 행세, 요샛말로 가난 코스프레를 한다고 느꼈을 때, 혹자는 주인공이 '상훈'에게 품은 분노를 떠올린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p.22

가난 탈출 신화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큰 그룹일수록 신화가 가지는 의미가 큽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의 건국 신화는 이미 책도 많이 판매가 되고 있는 고전문학 중 하나죠. 가난탈출 신화도 그 못지않게 공고한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의 동화에서부터 지금 성인들의 서점 베스트셀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죠.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 진입하면서 개인의 주체성과 독립을 강조하며 스스로 가난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다고 느껴져요. 물론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이해도 되고 그 생각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공감합니다. 신화라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을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없애는 유용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더 처절하게 깨닫게 되더라고요.

 가난 탈출 신화와 비슷하게 가난 상황이 비극적이기만 하고 전혀 행복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가난한 상황에서도 따뜻함과 서로를 향한 배려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왜 우리는 가난에는 그런 여유와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가난이라는 상황을 탈출해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이라고 인지하게 만들잖아요. 그것이 스스로 잘못 살았기 때문이며 결국 넌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니엘 블레이크는 정부 지원금을 받아야 하지만 맨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도와주기도 하고 주체적으로 살았으며 '성실한 시민이고 인간이다'.


오늘날까지도 공공부조 체계를 갖춘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능력의 유무에 따라 수급자를 관리하는 제도나, 노동 의지에 따라 자격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분하는 관행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p.69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임금) 노동을 신화화한 한국 사회에서 정부가 여전히 지원의 명분으로 삼는 정당성의 언어이자, 개인들에게 자발적 책무를 부과하는 통치 전략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바라는 행동가들의 바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p.100

각자의 신화를 만들어야


 우리 모두 엄청난 확률을 뚫고 태어난 우연의 존재인만큼 어떤 그룹에 묶여 개인성을 상실한 채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빈곤하다고 해서 빈곤이라는 하나의 그룹에 속하고 빈곤과정의 서사가 같지 않잖아요. 가난을 탈출하는 서사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단 하나의 신화로 대표되지 않으려면 각 개인의 신화가 존재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사회가 기본적인 지원을 해야 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돈 벌기 바빠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시간빈곤에 처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는 것도 빈곤에 속하지만 저는 더 큰 문제가 시간이 없다고 여기는 빈곤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문제가 되고 있다고 봅니다.


공공개발이 이뤄진다면 임대주택에 어떤 시설이 있는 게 좋겠냐는 질문을 받자, 주민들은 꽤 상세한 답변을 내놓았다. 집 내부에는 "조리할 수 있는 싱크대" "베란다"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문" (각자 쓸 수 있는) "수세식 변기" "세탁기를 들여다 놓을 공간"이 있기를 바랐다. 단지에는 운동 시설, 의료 시설, 휴식 공간, "모여서 회의도 할 수 있"고 "수급 서류 상담도 받을 수 있는" 자치 공간이 있기를 원했다. p.149


"어떤 활동가가 가난한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 속에서 무언가를 도모하느냐 아니냐는 결국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취약하고 유한한 존재, 빈곤이라는 문제, 빈곤을 둘러싼 공론장, 빈곤에 맞선 비판 저항과 함께 머무르고 살아간다는 감각과 인식, 의지와 노력이 지구라는 너른 지평에서 창발 하는 꿈은 여전히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지구와 오래 동거하고 싶은 인간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할 긴장이다. p.398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만나서 모임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요즘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어쩌면 그 사람이 나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꽤나 희망적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요. 보통 어떤 재난상황을 돌아보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두 번째로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빈곤에 대한 프레임 중에 하나가 바로 제한된 자원입니다. 한 해에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전 세계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을 비교해 보면 식량은 이제 충분한 상황입니다. 어떤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정의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파고들면 사실은 실체가 없는 두려움일 수 있는 거죠.


 마지막으로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 생각나서 조금 적어봅니다. 작년에 읽었는데 노동에 대해 충분히 다면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 아네르스 포그 옌센>

<가난의 문법, 소준철>

<불쉿 잡, 데이비드 그레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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