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쓴 적이 없었다. 이번 영화는 유독 여운이 많이 남는다. 작년에 그런 여운을 줬던 영화는 '너와 나'였다. 그렇지만 차마 무언가 쓰기 힘들었다. 딸을 키우고 있어서인지 마음이 먹먹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글까지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는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에 동의하고 아주 작지만 글을 써서 사람들이 읽는다면 아이들에게 떳떳한 어른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단어는 바로 '어른'이다. 누가 어른인지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와 같은 여러 질문이 마구 떠오르고 답이 궁금하다. 이런 글이 조금은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적어본다.
영화 속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런데 영화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연출이 있어 기억에 남는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사람이 없이 자연만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다 장면은 끊기지 않았는데 음악만 갑자기 끊긴다. 마치 길을 걷다가 앞에 유리문을 보지 못하고 이마를 부딪힌 것 같은 당혹감과 충격이었다. 제대로 세어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3번 이상이었다. 영화 음악은 영화를 구성하는 큰 요소 중 하나인데 이렇게 중간을 부자연스럽게 끊어버리는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균형이 깨진 사람들로 영화에 등장하는 건 바로 글램핑 야영장 건설을 위해 마을에 내려온 직원 둘이다. 산골마을에 설명회를 한 이후 다시 내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자리를 잃고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은 없이 그저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는 주체성이 사라져 버리고 일이 미칠 여파는 안중에 없다. 나중에 장작을 패는 것만 관심이 있지 사슴이 다니는 길이나 어디로 갈지 궁금하지도 않다. 자연이 있어야 내가 있는데 균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돌이켜보게 된다. 균형을 잘 잡고 살아가고 있을까.
글램핑 야영장 건설을 위해 직원들이 산골마을에 내려와 설명회를 하고 나서 타쿠미에게 직원이 번호를 받으려고 할 때였다. 타쿠미가 (휴대폰)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남자 직원은 명함을 내밀었고 여자 직원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불통의 현장을 표현한 일례였다.
이후 산골마을에 내려와 장작을 패고 우동집에 가져갈 물을 같이 준비하고 나서 남자 직원에게 타쿠미가 제스처를 취할 때 담배를 내주던 모습은 소통이 됐다는 표현을 나타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전에 가락국수집에서 가락국수를 먹고 나서 가락국수가 따뜻하고 말한 건 가락국수가 맛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설명회 자리에서 가락국수국물을 직접 이 마을에 있는 물을 사용해서 만든다고 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따뜻하다라니. 따뜻하지 않은 가락국수가 어디 있단 말인가. 대사가 많지 않은 영화였지만 그 와중에 인물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배치를 해서 그런지 짧은 러닝타임 안에 여러 표현이 가능했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건 상대방을 알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설명회 때 두 직원의 상반된 대화 태도는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기보다 때로는 빈 공간을 만들어놓고 관객들과의 소통을 원했던 것이 영화 마지막에 나타났던 것 같다. 소통은 어렵다. 일방향적인 경우가 더 많을 거다. 그렇지만 과감하게 상대방을 신뢰함으로 불통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예전에는 영화를 볼 때 선명하지 않고 빈 공간이 많은 것을 즐기지 않았다. 이제 와서 취향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관객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영화도 좋다. 모든 일에 답이 없고 스스로의 선택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싶다. 상대방을 알려는 노력도 계속하고 싶다.
산골마을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언가 만들어야 할 때 꼭 논의가 필요한 것들이 있다. 도시에서는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기반시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설명회에서 정화조 이야기를 길게 했던 건 다분히 감독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의 중요성도 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기반시설이 있고 이것이 자연을 해치는 방법으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감독의 답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하마구치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을 보면 관객들이 영화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게 될 될 거라 생각한다"면서 "자연에는 선과 악, 정의란 게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https://news.koreadaily.com/2024/04/01/life/artculture/20240401081146982.html
헤겔이 말했듯이 비극은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동조자>중에서)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최근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삼체>도 마찬가지 갈등을 다루고 있다. 서로가 생각하는 옳음과 옳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옳음이 한 끗 차이로 악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글램핑 아영장 건설을 주도한 회사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그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모든 사람을 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거다. 자본을 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악은 아니지만 균형을 잡지 못하면 악처럼 보일 수 있다. 타쿠미도 설명회 마지막에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나. 나는 이 개발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이 말은 균형 있는 개발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본이 개인을 악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과연 균형이란 존재하는 걸까 의문이 생긴다. 우린 이미 너무 균형을 잡지 못할 정도로 멀리 와버린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