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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Oct 02. 2024

방황은 나태함을 이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읽고

범인의 등장, 나태함


나는 흉계와 악의보다는 오해와 나태함이 오히려 이 세상에 더 많은 혼란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네. 적어도 흉계와 악의가 훨씬 드물다는 것만은 분명하네. p.13


 세상에 더 많은 혼란을 불러오는 것을 굳이 생각한다니 신선하다. 책에서는 여러 혼란이 등장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혼란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나 의도라고 생각하는 게 혼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니까. 이때 흉계와 악의는 의도가 있다. 보통 흉계와 악의에서 멈추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베르터는 달랐다.


 오해와 나태함은 오히려 의도가 없어서 더 위험하다. 대부분이 의도가 없는 행동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의도 없이 시작된다. 원인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다면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텐데 오해와 나태함은 그런 의미로 관찰대상에 속하지도 않는다. 실제 소설 속 베르터의 사랑, 로테가 알베르트와 약혼을 하게 된 경위도 특별한 의도가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나태함을 이기는 방황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위 문구는 괴테를 대표하는 문장이 됐다. 베르터의 고뇌가 느껴지는 중반부 이후의 방황은 나태함을 이겨보려는 노력으로 대표된다. 신분제에 대한 비판(p.17)을 시작으로 이후 여러 방황이 계속된다. 생각해 보면 어떤 방황 없이 어떤 실패 없이 성장한 사람은 면접에서 장점으로 통하지 않는다. 최근 봤던 책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어 적어보고 싶다.

저는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흠, 그럼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른다."라는 거네요. 그런 사람은 우리 회사에 필요 없습니다.


계몽과 합리의 나태함


 알베르트 권총을 두고 이어지는 다툼이 알베르트와 베르터가 상징하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알베르트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베르터는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pp.76~77).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학문적으로 나태해졌다. 이후 '베르터'의 등장으로 할 말을 제대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다. 특정한 의도를 가진다는 건 어떤 문제나 빈틈을 공략하는 부지런함이다. 지금 베르터를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지금도 당연하게 좋은 직장, 좋은 학교를 나왔다면 그들끼리의 만남과 모임이 일상적이지 않은가. 그 공고한 틈 속에 나태함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부지런한 오늘날의 베르터가 이 시대의 나태함을 물리쳐주길 바란다.


나태함의 반대는 자연


 사람은 언제든지 나태해질 수 있다. 반면 베르터가 예찬하는 자연은 절대 나태해질 수 없다. 자연에 대한 예찬(p.13)을 보거나 자연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다(p.25)는 대목을 통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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