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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Sep 24. 2024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카산드라

<카산드라>를 읽고

 올해 초반에 <천 척의 배>를 읽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 같다. 그 책에서는 트로이 전쟁에 등장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했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이피게니이아였다. 트로이 전쟁에 대해 친숙하지 않아 마치 결혼하는 것처럼 치장을 하고 나갔는데 그 자리가 결혼식이 아니라 제물이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느끼는 배신감과 당혹감을 마치 내가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적대적 공존


 트로이의 '에우멜로스'와 그리스의 '아킬레우스'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적대적 공존이 떠올랐다. 권력자가 권력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필요로 할 만큼의 공동의 적이 필요하다. 적대적 공존에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면 트로이전쟁은 부정적인 것에 가까웠다.

 위대하고 유명한 그리스 함대 사령관이 자부심이 없는 겁쟁이인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p.71)고 표현하면서 강한 적과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법이라고 말이다. 적대적 공존에서 긍정적인 결과라고 한다면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상대를 만나서 지더라도 성장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겁쟁이에 올바른 방식으로 싸우지 못한다면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싸움을 하게 된다. 트로이 전쟁이 그러했고 특히 '이피게네이아'를 아가멤논이 제물로 바치고 나서 권력자가 마치 희생자인 양 논물을 흘렸다는 장면(p.72)에서 사용하는 어휘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이야기한다.



 누가, 언제 말을 다시 찾을까(p.14)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이 있다. 카산드라는 예언하는 힘을 얻은 대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도 카산드라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말을 빼앗긴다는 것과 주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동일 선상에 둔 것 같았다. 주체성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말'에 주목하는 대목들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언제부터 일개 장교가 단어를 쓰라 말라했던가. '왕당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스파트라인 메넬라오스를 우정의 손님이 아니라 정찰병이나 첩자로 간주한 다음부터였다고 한다(p.74). 바로 에우멜로스가 주도했던 것이다. 미래의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움직임은 말이었다. 말이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 말을 반복해 재생산하면서 마치 사실처럼 여기게 된다. 어쩌면 신화도 그렇게 권력자들에게 재생산되며 우리 곁을 지키고 있었다고 넌지시 볼프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해 본다. 어떤 말을 오래 하다 보면 결국 그 말을 믿는 법(p.87)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떤 말을 새겨야 할까(p.89). 바로 동족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말을 만드는 걸까. 말을 만들고 신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견딜 수 없기에 낯선 상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p.165). 마찬가지로 내가 그 고통에 이름을 붙일 수 있고, 고통이 그 이름에 대답했다는 사실이 조금 숨을 돌리게 했다(p.173)고 한다. 말은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보다 많은 일을 하지만 말에 매몰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잃어버리더라도 헤쳐나갈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아마도 주체성과 연결되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요즘 개인적인 화두는 '주체성'이다. 그 시대를 이해하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고 우리 사이에서 그 시대의 이름은 에우멜로스였다고 한다(p.102). 아마도 신화가 에우멜로스라고 해석됐다.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남아있던 유교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가장 초반에 카산드라가 이야기하는 밧줄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나 질긴 밧줄로 삶에 묶여 있는가. p.8)


 우리의 믿음과 자부심은 죽은 영웅 숭배에 기반하고 있다며(p.134) 대체 무엇을 나는 믿었던 걸까 질문을 던진다. 에우멜로스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 트로이는 갇혀 버렸고 우리는 지금 유교사상에 갇혀 있는 꼴이다. 이런 환상은 권력자에게만 주체성을 부여하고 나머지를 희생자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주체성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승리자로 치켜세워진 약한 남자들은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여자들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고 하는데 전쟁 강간이 떠올랐다. 강간은 한낱 정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범죄라는 사실을 말이다(<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참고). 남성의 정욕을 신화화시켜 마치 예전부터 존재했으며 없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말의 굴레에 갇혀있어 다른 가능성의 언어를 빼앗겨버린 상황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래서 더욱더 '이피게니이아'가 떠올랐을 수 있다.


 과연 언어를 잃어버리고 주체성을 빼앗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뭘까? 주체성을 다시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말할 용기와 관찰이 본문에 나오는데 모임에서 답을 더 얻어가고 싶다.


생기가 넘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어떤 것을 생기가 넘친다고 할까.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꾼다는 가장 어려운 일을 겁내지 않는 것이다. 말입니다. p.31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관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카산드라는 오직 나만 보았다(p.79)라고 하며 경험했다고 표현했다. 결국 그때 내가 우리의 멸망이 시작되었음을 '보고' '보았을' 때 그것은 경험이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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