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눈을 떠보니 나무가 빼곡한 숲 속을 걷고 있다. 갑자기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뽀득뽀득 눈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숲 속을 혼자 거닐다 눈에 덮인 책이 보인다. 눈을 털고 책을 집어드니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그렇게 눈이 더 이상 내리지 않고 햇볕이 내리쬐며 눈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장소에서 책을 읽었다. 잠시 눈을 감고 다시 떠보니 의자에 앉아 다 읽은 책을 들고 있었다. 예전 아이슬란드 여행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혼자 광활한 자연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느꼈던 해방감과 경이로움이 책을 읽으면서 느껴졌다.
눈이 내리는 모습은 내면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과 우리 뇌가 구성한 것의 조합(p.109)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 눈 내리는 장면이나 눈에 대한 묘사는 나의 뇌가 구성할 수 있는 다양성을 부여한다. 눈을 보며 어떤 장면을 떠올리거나 예측할 수 있는데 이때 아주 실제적인 의미에서 뇌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학습'은 다음번 예측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이 책을 읽고 난 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나 미래에 다르게 행동하도록 예측을 바꿀 힘이 생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 이후 다시 읽어보게 된 소설인데 마치 예전에 이 책을 정말 읽었나 싶을 정도로 그 사이에 읽었던 책이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치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 책을 모국어로 읽게 될 날을 위해 그동안 공부해 온 듯하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상하게 된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역사적 상처를 직면하게 했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드러냈으며 시적 산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수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문학을 읽는 이유에 대해 종종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결국 그 역사를 만들었고 영향을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개인에게 집중해야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특히 이번 작품에는 이 대답이 가장 잘 어울린다. 역사는 승리한 사람들의 서사인 것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 역사적 상처를 바라보는 경하는 처음엔 역사에 다가서지 않으려 애쓰지만 거부할 수 없어 험한 눈밭을 헤치며 결국은 마주하게 된다.
눈 덮인 산속에 고립된 경하를 보여주며 인간의 취약성을 자연과 대비시켰다. 그렇지만 그런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눈이 차가울 수도 있지만 덮고 나면 따뜻할 수 있다는 상황을 통해 이중성을 강조했다(p.132). 이후 두 가지 느낌이 공존한다고 표현된 부분과(p.168, 202) 두 개의 상태가 된 엄마(p.291)를 통해 취약성이나 인간이나 모두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취약성을 재현하는 방법에 있어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눈 덮인 장소에서 꾸는 꿈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시적 산문이라고 극찬한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눈에 대한 여러 표현을 모아봤는데 그에 대한 표현 또한 아름답다. 슬픈데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은 두 가지 감정이 모두 들게 한다.
인선의 다섯 살 모습 꿈에서 애기 얼굴에 눈이 안 녹고 있었다. p.81
눈에도 무게가 있다고 말한다. p.109
눈의 한기가 목도리 사이로 파고드는 공격의 상황을 처음 맞이함. p.127
눈 속이 더 포근했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어요. p.132
물은 순환하니까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고 말한다. p.133
눈의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p.194
마지막으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할지 생각해 봤다. 경하와 인선이 하려던 프로젝트의 이름으로 책에서는 나오는데(p.192) 결국 제주 4.3 사건이라는 슬픈 역사적 사실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는 작가의 다짐이 아닐까 싶다. 상처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이 경하가 눈보라 치는 제주도 인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인 것 같다. 힘들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나 또한 세상의 아픈 상처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살아갈 용기를 작품을 읽고 나서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