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비즈니스의 시대>를 읽고
자본주의 시대 부품이 되어버린 사람들
사람이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해 보게 된다. 거주할 수 있는 집이 가장 우선순위가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동산에 관심을 많이 둔다. 다음으로는 내 몸의 연료인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다음은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옷은 관심이 거의 없고 몸이 아픈 경우도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중 회사에 들어가 건강검진을 받고 이상소견을 받은 뒤 의료 비즈니스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됐다.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을 받은 뒤 몸에 문제가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다. 사회가 정해놓은 이상 없는 몸이 사람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건강한 상태로 유지되길 원한다는 걸 말이다. 마치 냉장고에 서 신선함을 유지하는 식품처럼 의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몸을 가진 존재는 몸을 담보 잡힌 채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몸을 보기 좋게 관리하기 위해 운동하고 좋은 걸 사 먹고 그걸 위해 돈을 벌고 쓰면서 말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경제 생태계를 움직이는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자본주의의 부품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렇지만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을지 혹은 내가 그 변화를 이끌 순 없을 거란 무력감에 휩싸이기 쉽다. 그렇지만 때마침 나 하나라도 정신 차리고 있어야 민주주의 자체가 무너지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덕분에 정신을 단단히 챙기고 아무리 먹고사는 일이 급하더라도 더 시급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줬다.
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최고의 선이고 목적이 되어버린 지금 필수 의료의 정당성과 윤리, 도덕을 내세워봤자 말만 번지르르하다. 필수 의료 문제를 다시 정상화시키려면 돈으로 해결하는 방법 말고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정치가 제도와 시스템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번 계엄선건과 동시에 해제할 법이 없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질병과 건강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구분에 의문을 품고 질문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에 나 하나뿐이더라도 신경 써야 한다.
끄적인 생각들
부동산과 의료 모두 전문 분야가 되면서 정보비대칭 문제로 인해 소비자 소외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각종 전문 용어와 전문가만 알게 되는 폐쇄적인 정보에서 소비자는 당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매번 고민하지만 언제나 답은 하나다. 어렸을 때부터 정보에 대한 분별력을 키워주는 수밖에 떠오르는 대책이 딱히 없다. 부동산, 의료만 문제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매번 정보비대칭과 수많은 정보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려면 선택의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데 그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의 주관이 생기려면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정에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 교육과정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길 바라며 교육을 변화시키고 싶다.
현재 우리나라의 필수 의료 문제는 장기간 필수 의료수가를 과도하게 억제해 온 환경 위에 사기업에 가까운 병원 위주의 진료가 고착되면서 생긴 조용한 사직의 문제이다. 타 직종과는 달리 의사들에게는 필수 의료를 버리고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그럭저럭 많이 있다. 설령 그것이 타락했다는 비난으로 이어질지언정, 금전적인 보상은 고사하고 모욕과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이렇게 일할 수는 없다는 의사들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가 현재의 위기이다. 국가가 어떤 대안도 마련하지 않고 자본주의 의료를 방관하는 상황에서 먼저 마비되는 것은, 불행히도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필수 의료이다. pp.220~221
- 술라이커 저 우아 드는 자신의 책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에서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인용한다.
인간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좋은 여권만을 사용하길 바라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잠시나마 다른 쪽 왕국의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
저 우아 드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 22세의 청년이었다. 그녀는 백혈병을 진단받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암 생존자에게 부여되는 영웅담 서사의 허구성을 깨달으며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문득 질병과 건강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생각한다... 수명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두 왕국의 경계를 계속 넘나들며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 조건이다. 아름답고 완벽한 건강이라는 닿을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끝도 없는 불만족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pp.254~255
-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너무 낳은 사람이 '완벽한 건강', '완벽한 정상 상태'가 있다고 믿고 이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가 유난히 정상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인데, 그러다 보면 삶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하는 많은 문제를 마땅히 치유해야 하는 비정상성으로 낙인찍게 된다. 255
- 먼 미래의 환상적인 최첨단 기술에 의한 치유에 방점을 찍으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애나 질병과 함께 잘 살아볼 수 있는 방법은 우선순위에서 힘없이 떠밀린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될 수도 있는 사회의 많은 약자들의 설 자리를 지우고 삶에 대한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불행히도 남는 것은 끊임없는 불안뿐이다. p.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