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푼짜리 오페라>를 읽고
칼잡이 매키는 노래 속 인물로 등장하고 이후 피첨이 노래를 부르며 등장한다. 사람의 동정심을 깨우는 것이 제 사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적합한 비참함의 다섯 가지 기본 유형을 말하는데 실제 당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발전한 교통수단의 희생자, 전쟁 기술의 희생자, 산업 발전의 희생자로 나열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과학 기술의 발전의 희생자들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장점만 가져다줬다는 인식을 많이 심어주었지만 희곡을 통해 희생자가 많다고 풍자하니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 기술이 정말 좋기만 한 건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거다.
이 책의 배경으로 영국 여왕의 대관식이 나오는 걸 보고 1837년 즈음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글은 1927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과학과 기술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던 태도에 반작용이 1960년대 즈음 등장했으니 30년 일찍 문제 제기를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한창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희망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지만 도시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노동력 제공의 역할을 맡았다. 기계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게 숨 죽이고 있어야 그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목소리가 없어야 하는 존재가 말을 하고 주도적으로 판단을 내리면서 등장하는 것이 당시 파격적이었겠다. 폴리가 직접 결혼 상대를 골랐던 일이나 맥을 신고한 제니가 그랬다.
그 외에도 여러 모순이 등장하다 보니 전에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브레히트가 당시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있다 보니 혁명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을 등장시킨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모순을 알아차리게 하기 위해 작품에 다양한 기법을 등장시킨다. 낯익은 것을 생소하게 보고, 비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을유출판사 p.284) 모순을 알아차리려면 능동적인 현실 인식이 필요하는 거다. 한마디로 폴리나 제니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능동적으로 현실 인식을 하지 않는 살아있는 좀비가 만연하다고 느껴지는데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적용가능한 이야기라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18세기의 '부르주아' 정치사상은 사회관계를 사유하기 위해 계약이라는 법적 형식을 마련했습니다. 19세기 '혁명' 사상은 투쟁을 사유하기 위해 모순이라는 논리적 형식을 마련했습니다. <권력과 공간> 중에서 pp.65~66
폴리는 피첨의 딸로 존재해야 하는데 자기 자신으로 주체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관중들이 열광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은 동물이나 식물이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오페라가 나온다면 관중들이 열광할까? 최근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는 바이러스에 걸려 지구의 미래에 대해 각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소설을 봤더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