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펙토르의 시간>을 읽고
리스펙토르의 책을 읽고 나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글의 매력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지만 어떤 매력인지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함에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을 때마다 입술을 떼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뻥 뚫리는 상쾌함이 조금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를 향해서 글을 쓰지 않고 모두를 향해 글을 썼으며, 글쓰기를 향해 글을 썼다. p.11
그녀는 두 가지 용기를 지녔다. 하나는 원천, 자기의 낯선 부분으로 갈 용기다. 또 하나는 그곳에 갔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거의 자기가 없는 채로 그녀 자신에게 돌아올 용기다. p.24
여기에서 용기에 대한 정의를 두려움의 길을 알고 내려가 죽을 만큼 두렵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두려움을 알게 되지만 그것을 살아 낼 수 있게 된 여자들, 그녀들만이 지닌 용기라고 한다. 여러 여자가 떠오른다. ‘폭삭 속았수다’에서 강렬했던 대사면서 자주 등장했던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가게 만드는데 주어지는 희망과 온기가 리스펙토르의 글에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시인은 절대적 순수함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낯설게 하는가? p.31
다시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G.H.라고 다시 불렀다고 하는데 ‘G.H. 에 따른 수난’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처럼 순수한 허기는 하나의 시작이다. 그처럼 치명적인 허기로부터 삶을 사랑하는 힘이 태어난다. p.32
리스펙토르의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에 대한 순수한 허기가 느껴진다. 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책을 붙잡고 있지 않으면 허기지고 기운이 없다. 책을 읽고 나면 무언가 사랑하는 힘이 마찬가지로 태어난다.
나는 잠들지 않았지만 두 눈은 얼어붙어 있었고, 내 시선은 사물들에게 가닿지 않았다. 글쓰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일곱 개의 혀/언어로 차례차례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에게 이르기까지, 나의 부재를 지나 현존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나에게 자신을 읽어주었다.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가 내 앞에 자리 잡았다. pp.37-38
누가 대가를 치르는가? 누가 우리의 비용을 계산하는가? 우리의 저축을? 우리의 망각을? 우리의 상실을?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생명이 자라나고 스스로를 인간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천천히 행동하고 충분히 깊이 숨 쉴 줄 알아야만 한다. p.57
우리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으며, 공간은 시들어 간다. 우리는 사랑의 공간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일구길 멈추고, 감각은 위축되며, 맛을, 촉감을, 느낌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오렌지를 포기한다. 우리는 표류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p.67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나의 정원과 오렌지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실제로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돌보는 것인지, 소홀히 하는 것인지,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르게 될 수도 있다. 나 또는 주변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살펴보다 보면 돌보는 것인지 자신을 투영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도 헷갈릴 때가 있지 않은가. 그대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싶다.
리스펙토르의 글이 지금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는 정확하다. 고전적인 구조를 탈피하고 새로운 구조에 대한 시도.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기존의 이해 속에 갇히지 않고 벗어날 용기를 주는 존재다. 글을 읽으면서 미미하지만 단 하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그것이 두려움으로 들어가는 길일지라도 힘들더라도 알고 나면 선뜻 가볍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난해한 리스펙토르의 글을 마주했을 때 길을 잃어버렸지만 읽으면서 길을 찾게 되는 매력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형태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이야말로 표류했던 나를 건져 올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쩌면 길을 찾으려면 길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꼭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