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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Oct 20. 2022

누구나 소수자일 수 있다

<마이너필링스>와 영화 <그린북>을 읽고 보고

 <마이너필링스>와 영화 <그린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 놀러 갔습니다.


처음부터 소수자인 경우는 드물다


 태어났을 때부터 일제 식민지였다면 당연히 일본어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마찬가지로 넬슨 만델라가 살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영국인이 통치했을 때 태어났다면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었겠죠.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외치지만 그들의 행동에서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밝혀낼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소수자로 취급받지 않는다면 안정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생존해나가는데 유리하기 때문일까요?


2017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이 공정한 실력주의 사회라는 관념은 저소득층 흑인 및 갈색인 6학년 학생들 사이에서 자기 회의와 행동 장애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어느 교사가 말한 대로 "아이들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었다.

<마이너 필링스> 중에서


 결국 공평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때 그 책임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어버립니다. 사회적인 책임을 줄이기 위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버리는 체제가 과연 올바른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막상 내 일이 아니라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힘들다고 느끼는 현대인에게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는 사치라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문장처럼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많은 시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견디어내는 것 자체도 엄청난 용기잖아요.


 세상에 수많은 소수자 감정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견디는 것도 용기며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알아차리는 예민함을 가지고 싶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어떻게 지내요> 중에서



조금 아쉬웠던


 사람들이 생존 본능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소수자를 만들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없어서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자신의 생각을 합당한 근거와 논리로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타당한 반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추가했다면 더 풍성한 논증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생존 본능에 대한 답은 아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다뤘던 것처럼 교육을 통해 누군가를 혐오하도록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이를 키워보니 태어나서부터 혐오나 차별을 인지한다고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커가면서 어른들의 반응을 보고 배운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결국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이 답이라는 뻔한 답이 나온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뻔함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인생에 지름길이 있나요?' 답은 사실 뻔합니다. 그런 길은 없다는 거죠.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다 결국 더 먼 길을 돌아가게 되면서 목표지점에 도달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반면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겠죠.


“피부색이나 성장 배경 혹은 종교를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타고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넬슨 만델라는 썼다. “혐오는 학습괴는 것임이 분명하며, 학습을 통해서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도록 배울 수도 있다. 사랑이 그 반대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불관용에 대해서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바, 즉 “불관용은 ‘닫힌 마음’과 ‘무지’의 소산”임을 질 담아낸 아름다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희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면 다름은 다름대로 지키면서도 관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교육을 통해서 관용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자 캐런 스테너의 말이다. p.250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중에서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p.95-96

<선량한 차별주의자> 중에서


 우리는 말을 하면서 어떤 단어를 발화하는 것이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요? 때로는 약자라고 생각했다면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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