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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Jan 10. 2023

데미안이 필요하다

<데미안>을 읽고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데미안은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상징하는 어떤 것이 말을 하고 형체가 있는 것처럼 쓴 환상문학 같은 느낌 말이죠. 그즈음에 환상문학을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데미안이 그저 등장인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내 안의 악마


 맨 처음에 '또 하나의 세계'(p.11)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주인공이 사는 집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때부터 데미안을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인데 악마를 형상화하겠다는 예고편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두 번째 읽다 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용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흥미롭네요.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p.52
내 자신의 힘과 노력을 통해서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중략) 나는 자신을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p.62


 데미안 덕분에 문제를 해결한 것이 결국 자신을 의존적으로 만들었고 그런 실망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잊고 싶어서 이후 데미안을 모른 척했던 게 아닐까요. 내 안의 악마를 모른 척하고 싶은 감정하고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이후에도 데미안이 또 다른 나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종종 발견됩니다.

이런 충격들은 늘 <다른 세계>로부터 왔고 늘 두려움과 강압과 양심의 가책을 수반하였다. 그것들은 늘 혁명적이었다. 내가 그 안에 그대로 머물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
(중략)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했던 시절이 왔다. p.65

(그리고 여기 <다른 세계>라고 언급된 부분의 독일어 원문이 궁금합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지요)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p.116



알에서 나온 나 (알에서 나오고 싶은 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p.123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p.190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아직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까지는 그랬어요.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는 의미로 읽히는 이유가 거기 있겠죠. 저는 압락사스에 대한 문장보다 그 아래 적은 문장이 더 좋더라고요. 그 길이 어렵기만 했는지 물으면서 그다음에 아름답지 않았는지 그리고 더 쉬운 길을 알았는지에 대한 질문이요. 늘 어렵다는 말이 그때도 읽으면서 위안이었던 것처럼 언제 읽어도 참 편하다는 느낌을 받네요. 어렵기만 하지 않고 아름다웠다는 표현이 다른 책에도 많지만 헤르만 헤세의 문장이라 그런지 유독 인상적입니다.


 전쟁을 겪었던 헤르만 헤세가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각자 개인이 자신을 잘 알고 알에서 나오려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헤르만 헤세가 토마스 만과 친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요일엔 <싯다르타>를 읽고 모임을 하는데 그 독후감에도 비슷하게 적었습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도 주인공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헤르만 헤세의 주인공과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다는 점은 맥락이 같았어요.


 개인적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혹은 매력적인 모습을 만들어주는 것은 적절한 고통이라고 생각해요.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동물과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사람과 다르게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가장 쉬운 길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의 소설이 꽤나 길게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야의 이리>로 2012년에 시작된 헤르만 헤세와의 만남이 아직도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는 사실이 매력적입니다. 앞으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어요.


(수레바퀴 아래서가 떠오르는 장면들)

내게 가장 결핍된 한 가지, 그건 친구였다. p.102
나는 내 또래들을 다소 경멸적으로 어린아이들로 보는 습관을 길렀다. p.94
이제는 우리들 누구나 큰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와 버렸어. p.214



이후 독서모임에서


 <수레바퀴 아래서>가 떠오르는 문장이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큰 수레바퀴'란 독일어로 말하면 '대승불교'라고 합니다. 데미안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가 가톨릭으로 시작해서 불교가 드러나는 방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운명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라는 내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문학의 실사구시 역할을 위해 '루틴을 만드는 것이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답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저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루틴 만들기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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