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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Jan 11. 2023

불안으로부터 시작되는 여정

<싯다르타>를 읽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읽을 기회가 많이 생겨 차례로 읽는 중입니다. 무려 2012년에 <황야의 이리>를 시작으로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이번에 <싯다르타>까지 인상적인 작가의 인상적인 작품에 매혹되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내면에 집중하는데 최근에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다 보니 둘이 왜 친한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더라고요.


불안으로부터 시작


 초반 싯다르타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는 마지막 즈음에 '불안'이라는 단어로 외부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싯다르타 자신이 정의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느끼는 불안으로 인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학생 때와 같은 마음가짐이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했던 기억이 있어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의 방식을 바꿨거든요.


 그 이후에 불안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만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들더라고요. 불안이 나에게 다가와서 미치게 되는 1차적인 영향이 상당히 부정적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잠을 못 자게 한다던가 잠시 숨을 못 쉬게 한다던가 하는 물리적인 고통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불안상태에 있었을 때는 어떤 것도 시작하지 못했고 겨우 최악의 몸 상태를 벗어나니 새로운 시작을 꿈꿀 틈이 보였어요.


 불안이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게다가 불안의 형태로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호기심의 형태가 그 이후에는 더 긍정적이고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우위에 있지 않을까요.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많은 것들이 지금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줬거든요. 사는 곳, 생각하는 것, 주변 환경,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 부동산을 하고 책을 읽고 북클럽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무언가 불안보다는 궁금하다는 느낌이 지금의 저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느껴져요. 어쩌다가 불안에서 호기심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계속 적어볼게요.


직접 경험하는 지혜


 마지막쯤 '지혜는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싯다르타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래 문장처럼 중간에 자기 자신에게 배우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싯다르타가 사문이었다가 상인이었다가 다시 뱃사공이 되면서 지혜를 얻기 위한 여정을 했는데 지혜는 고타마가 주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했고 아래 문장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으로 저에겐 해석이 되더라고요.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 p.62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는 질문이 있잖아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는 사실 먹어봐야 알거든요. 대신 모든 것을 먹어볼 수 없으니까 책을 통해 간접체험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살아있는 시간 동안에 많은 경험을 하길 원하는 인간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직업을 여러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같이 처리하는 제 자신을 봤을 때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하기 전까지 많은 책을 읽고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도 해보지만 역시 직접 하는 것만큼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든 거더라고요. 특히 8년이나 회사생활을 하다 사회에 나오니 지식과 현실의 괴리는 상당했어요. 싯다르타도 실천적인 지식을 추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전을 외거나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어땠는지 카말라를 만나는 부분에서 느껴졌거든요.


 가장 지혜가 필요하면서 동시에 삶의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연인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저는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래 문장에서 아들이 생기고 난 후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는데 너무나도 저와 비슷해서 놀랍더라고요. 지식과 경험의 간극이 가장 큰 영역이 바로 아이가 아닐까 합니다.

자기 아들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싯다르타도 완전히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한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어떤 사랑에 빠져 버리고 어떤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어 버리는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p.176

시간을 잊는다


 싯다르타도 삶이 마지막 여정까지 자기 자신을 통해 배우는 것이 많았잖아요. 사문이었던 싯다르타가 상인일 때 영향을 줬고 마찬가지로 뱃사공일 때도 영향을 주면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부분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사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변수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의 시작을 제공했는지 그 결과가 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필요하다는 이야기말이에요.

이 모든 변수 중에서 특별한 변수 하나를 선택해 '시간'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과학을 하고 싶다면 변수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하는 이론이 필요하다. p.125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중에서


 싯다르타가 어떤 깨달음을 얻어 외형이 변할 때마다 고빈다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 장면마다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못 알아보는 것이 인간이 관찰자일 때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내면이 변화하게 되면 외형도 변하게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외형이 변한다고 해서 내면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요. 싯다르타가 장점이라고 꼽은 사색, 기다임, 단식에 따르면 외형을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기보다 그 사람을 관찰하고 기다리고 사색하며 생각하는 시간 혹은 서로의 교류가 필요하고 그것을 가져야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지 않고 내가 사는 대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하여 오랜 시간 노력하였지만 아직도 그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어. p.37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게 되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멈추지 못하고 후대에 깨달은 것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침 올해부터 한국사를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딱 읽기 좋았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독후감을 쓰고 나서 독서모임을 했고 그때 받았던 질문과 답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도 그렇지만 인간은 배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다기보다는 입력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자신만의 Filter를 통해 입력으로 받아들일지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받아들이기로 정했다면 주체성을 가지고 받아들이는데 자신만의 구체화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했어요.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과연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았어요. 주체성이 있고 자신만의 언어를 만든 사람이 많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는 느낌이 <데미안>에서도 있었으니까요. <싯다르타>에서 좀 더 구체화된 인물의 형태가 나온 거 같았어요. <데미안>의 '데미안'으로 시작해서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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