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창녀들>을 읽고
로베르토 볼라뇨를 처음 접한 것은 2022년 1월이었습니다. <부적>이라는 책을 읽고 북클럽을 했는데 난해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마치 예전에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었다고 적어놨네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부적>과 같은 감정은 아닙니다. 1년 사이에 독서력이 높아졌는지 혹은 다른 작품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의미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사실 살아온 환경과 역사를 모르는 나라의 작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워요. 특히 번역본을 통한 내용이해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작품은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고도 전달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기에 로베르토 볼라뇨 작품을 연달아 읽는 모임에 흔쾌히 함께 하게 됐습니다. 호기심의 포문을 열어준 작품은 바로 <백년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입니다. 2022년에 읽었는데 환상문학의 매력에 빠질만한 유려한 작품이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보르헤스 작품을 읽고 싶어 예행연습 중인 거 같아요.
단편들로 이뤄진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혹은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라면 저는 '시'의 아름다움인 것 같더라고요. 워낙 시가 어렵고 생소한 저에게는 시를 찬양하는 것이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긴 합니다. 다만 아포리즘에 심취했던 볼라뇨라는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어떤 현상이나 장면을 자신만의 언어로 구체화하는 과정이 아포리즘이라고 느껴지거든요. 볼라뇨는 그런 추상화를 구체화하는 과정을 찬양했던 것 같아요. 언어란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고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자유로운 해석의 장을 통한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압축하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거죠. 시는 역시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관적인 방식보다는 각자에게 해석권을 넘겨주는 쪽을 택하는 것 같아요.
문득 아래 문구를 읽으면서 그런 논란이 생각났어요. 큰 독수리에게 쪼이고 있는 작은 아이의 사진 혹시 아시나요? 독수리가 아이를 공격하는 걸 알면서도 사진 찍느라 아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논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글도 어떤 책임감이 없이 실천하기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영원히 그 기록이 남고 그로 인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며 전체의 일부분인 부분을 반영할 뿐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고 말았고 쓰고 말았다는 것은 그 책임을 기꺼이 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해도 될 거 같습니다.
그게 영원히 날 옥죄리라는 걸 알면서도 찍고 말았어. p.18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문학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진이란 무언가를 재현하는 문학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찾아가는 문학의 형태를 띠고 싶어서 그림이나 사진을 매개로 글을 쓰는 작업을 볼라뇨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이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문학밖에 없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문학과 찾아가는 문학.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중에서 p.137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주제였다고 생각해요. 바로 예술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말이죠. 아래 문구도 인상적이었지만 헤르만 헤세 자신이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읽다 보니(<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중에서) 예술이 인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느껴지는 기이함을 볼라뇨의 단편 중 <치과의사>에서 혹은 <고메스팔라시오>에서 언뜻 보이는 것도 같고요.
<고메스팔라시오>에서는 사막의 색을 이야기한다던가 가난에 힘들어할 법한 아이들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계속해나간다는 이야기에서 왠지 인생 안에 예술이 진정 자리 잡아야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 같았어요. 예술을 사랑하고 지속해 나간다는 면에서 어쩌면 <달과 6펜스>도 떠오르긴 하네요.
<치과의사>에서는 아래 문장을 통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예술과 인생의 궤도를 가르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어떤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몹시 어색합니다.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에게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때가 많거든요. 예술과 인생이 평행하게 진행되는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것이 아닐까 해봐요. 호세 라미레스와 치과의사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그림으로써 독자에게 '당신은 이런 관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추측해 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줄 아는 사람이 예술과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는 삶이 우리 손바닥 안에 있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다고
(중략) 예술과 인생의 궤도를 가르는 기준이 뭔지 알아? p.214
볼라뇨는 예술적인 문제와 일상적인 문제를 구분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종종 일상적인 문제가 곧 예술적인 문제라 믿기도 했다.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중 p.34
굉장히 많은 부분에 걸쳐 죽음을 상징하는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에서는 슬픔, 용기, 농담이 주요 단어라고 이야기해서 놀랍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떤 단어가 볼라뇨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볼라뇨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두 개의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했다. 하나는 슬픔이고 또 하나는 용기이다. 하지만 이 세 번째 단어를 제외하면 다른 두 요소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바로 농담이다.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중 p.51
역시 독서모임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자가 한국 사람이라면 윤동주 시인일 것 같다는 이야기가 너무 와닿았거든요. 시집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몇 분이 이 책을 읽으면서 무기력과 권태를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반대로 저는 무기력과 권태를 부정하기보다는 당연히 그것들이 삶에 있겠지만 우정, 사랑과 같은 더 좋은 가치를 찾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라는 의미를 전달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윤동주 시인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무기력과 권태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면서 그것을 이겨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사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