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읽고
솔직하게 여자들이 보이지 않아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이렇게나 많은 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숫자와 예시로 일관된 내용을 읽다 보니 여자들 말고도 아이들이나 소수자로 취급받고 있는 계층이 굉장히 많을 것 같다는 짐작만 하게 되네요.
누군가를 배제하려고 공간을 설계한다기보다 누군가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는지에 따라 공간을 설계했던 역사 속에서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예상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여성이 많은 부분 공간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제는 여성의 인권이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아이를 낳고 좀 더 관찰을 하다 보니 공간에 환대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문턱은 물리적으로 낮았지만 그 위를 올라가는 내 모습을 반기지 않고 어떨 땐 공간에 왜 왔냐는 식의 반응은 꽤나 당황스러웠어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시선이 달갑지 않을 때의 위축되는 몸과 마음에 과연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아무래도 그렇더라도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최선이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사회가 바뀌지 않고 개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라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워요. 그래서 이런 책이 반가웠어요. 다 같이 짐을 지고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저는 아주 어릴 때 스웨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그때 떠오르는 운동장이라고 한다면 책에 나와있는 이상적으로 나뉘어있어서 여러 그룹이 전부 놀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렇게 구성되어 있던 공간이 떠오릅니다. 운동장도 있었고 체육관도 굉장히 크게 되어 있어서 비나 눈이 와도 놀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어요. 그곳은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어디에서나 놀 수 있었고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재미있었던 공간이었어요. 그 이후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했던 유일한 운동은 고무줄이었습니다. 학교 전체에서 가장 구석진 일부 공간만을 쓸 수 있는 고무줄을 그렇게 많이 했었어요. 구기종목을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여자아이들은 공과 관련된 운동은 거의 하지 않는 분위기였거든요. 마찬가지로 성별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 나뉘어 있다는 편견 때문에 게임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집에서만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학교를 들어가서야 PC방에 드나들면서 게임을 했는데 역시나 담배를 피우는 등 공간이 나뉘지 않고 냄새가 나는 시설관리로 공간이 여성친화적이라는 느낌이 들진 않았어요. 역시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였고요. 그땐 그런 구성이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간 설계가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 정말 크게 다가옵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소외되어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유누스가 생각납니다. 사회적 약자를 눈앞에서 지워버리면 된다고 1960-80년대에는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불해야 될 사회적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을 보면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편이 더 좋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요. 이미 예전에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를 도출하는 시간이 좀 더 짧아지고 있고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좀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은 눈에 명확히 보이지만 사회적 자본은 눈에 잘 띄지 않아요. 마치 공기처럼 숨은 쉬고 있지만 여기에 공기가 얼마나 있는지 측정하기도 힘들죠. 어떤 사회가 성장하고 쇠퇴하기도 하는데 쇠퇴 후 다시 일어날 동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신뢰가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이 가치를 인정하고 동의를 해야 하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는 사회구성원이 가치를 논의하는 격렬한 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신뢰는 그저 시간이 지난다고 형성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치열한 논쟁과 논의가 필요하겠죠. 그 과정이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처럼 조금 힘들 것 같네요.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인식해 보려는 노력이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아이를 돌보면서 프리랜서 일을 하는 입장에서 전체 시간의 1/3을 아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데 보내고 있거든요. 과연 정규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있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노동을 할 수 있을 권리도 인간답게 살 권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를 낳은 엄마들의 경우 돌봄 때문에 노동을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돌봄이 아이뿐만 아니라 노인에 대한 돌봄도 있더라고요.
이 책을 읽었을 때 떠오르는 다른 책들이 꽤 있었는데 하나만 언급하자만 하미나 작가님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었습니다. 아래 문장을 적어봅니다. 언어화되지 못할 때 고통이 심화된다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돌봄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 노동을 인지하고 문제를 도출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언어화되지 못할 때, 고통은 심화된다. 여성, 사회 하층민, 농촌 거주자, 저학력자, 지능이 낮은 사람에게서 신체형 장애가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들의 스트레스 관리 및 대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고통이 주류 학문의 담론으로 제대로 언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앎의 기본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특히 사회 속에서 나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 익숙한 지식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말하는 진실이 특정 집단에 더 호소력을 갖는다면 왜 그런 것인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떤 지식이 다른 집단의 고통을 설명하는 데에 계속해서 실패해 왔다면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지금 이 지식은 누구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 p.39
남성, 여성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다는 허구가 그동안 내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개인들에게 노출되는 광고도 이제는 알고리즘에 따라 보이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자발적인 노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애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조차 없어졌어요. 개인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는 현상이 전방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연 어떤 방법으로 개인의 짐을 덜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헤세는 일찍이 이렇게 일갈했다. "전쟁은 우리들 모두가 지나치게 게으르고, 지나치게 안이하고, 지나치게 비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눈감아버리는 비겁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p.558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중에서
사회는 재교육을 해줘야 할 의무가 있고 우리는 성실함을 어느 정도 갖추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도출해 봤습니다. 도시화, 개인화, 가족의 해체로 인해 예전에는 일상에서 배울 수 있었던 지식을 이제는 교육을 일부러 받아야 할 필요가 생긴 것 같아요. 결혼하기 전에 집안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결혼이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사소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간접경험해 볼 수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아이를 키우는 것 또한 여러 가족이 같이 살면서 경험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2008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을 때 만약 회사에서 여자 후배들을 처음 받게 되는 선배들에게 교육을 시켜줬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때처럼 정말 무지한 발언을 하며 누군가를 상처주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죠. 그런데 회사에서는 후배를 받아들이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순전히 개인의 몫으로 넘겨버린다면 굉장히 무책임하다고 평가받게 될 겁니다. 앞으로는 소수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구성원들에 대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알쓸인잡'에서도 마녀사냥과 히틀러를 다루면서 '성실함'이 전쟁과 무지함으로 인한 살상을 멈출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었습니다. 위 인용문구에서 봤듯이 헤세도 성실함이 없다면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어떤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개인이 변하지 않으면 정책과 제도가 변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과연 개인이 성실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걸까요.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기술과 인공지능(AI)인 것 같다. 기계 학습이 편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젠더 편견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
어린이들에 대한 정보도 공백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공간도 없을뿐더러 아직도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어리다고 생각하고 더 배워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일례로 그 때문에 투표할 수 있는 연령을 낮추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죠. 제가 만나는 어린이들은 어떤 어른보다도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편견이 적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나 판단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들은 체구가 어른에 비해 작고 누구도 말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동학대나 방임입니다. 학교 폭력도 예외가 될 순 없겠죠. 어린이보다는 그 어린이를 보호하는 보호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큰지에 따라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릴지 안 들릴지 결정되니까요. 대체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어떤 방법으로 취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오늘 모임의 질문으로 남네요.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