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개지만 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니다>를 읽고
책을 읽고 모임에 참여하기 전에 독후감을 먼저 썼는데 모임은 정말 너무 흥미롭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많아서 다시 정리해 봅니다.
우리의 우주가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내야만 한다면 이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주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 그렇다면 실제 우주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볼게요. 허블우주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누군가 이 망원경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찍자는 의견을 냈다는 거예요. 관측할 것이 너무 많은데 아무것도 없는 곳을 관측하자니 당연히 안된다고 했겠죠. 그런데 수많은 반대의견을 뚫고 관측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바로 그곳에는 수많은 은하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거죠. 이런 일화가 아직 우리의 기술로는 밝혀낼 수 없는 어떤 곳에 다른 우주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가 아닐까요.
사랑이라는 기적에 대해 알고 싶어서 존재하는 것 같아요.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서는 인간도 실험을 통해 종을 섞어 변종 실험을 하는데 하물며 자연은 어떨지 생각해 보라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우연을 통해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행위는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낮았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고 봐요. 한 사람 한 사람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장엄함이 어쩌면 작은 우주라고 생각해 본다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타인의 존재도 사랑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엄청나게 낮은 확률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죠.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것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있다.
<종이 기원, 찰스 다윈> 중에서
(위 이야기 중 일부는 최근에 반영된 '알쓸인잡'의 김상욱 교수님, 심채경 박사님의 이야기를 참고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모태신앙이 있어 신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제적이었지만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있어 다른 경로를 거치지 않고 주어진 세계관을 받아 써서 어렸을 적에 그럭저럭 잘 살아남은 것 같네요. 그런 와중에 의미 있게 다가온 문장이 있었고 그 문장을 지금까지 신념이라고 삼아왔었어요. 바로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태어난 이유가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였어요. 왠지 우리 모두는 각자 평범하게도 비범하다는 이야기가 제가 알고 있던 문장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고 책 내용이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처음 접하는 '인류원리'가 확률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했다니 반갑기도 하면서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더라고요. 확률은 워낙 여러 학문 중에 크게 잘하지 못하기에 그럭저럭 넘어가면서 읽었는데 이미 생각하고 있던 사고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어 반가웠어요. 다만 주관과 객관 모두를 거부한다는 것이 조금 새로웠습니다.
나에게만 주목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나를 투명인간처럼 여기고 싶은 유혹은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삼자처럼 나를 밖에서 바라보는 것은 이제 충분히 의도적으로 하고 있지만 투명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유혹은 차마 뿌리치기 힘들더라고요. 사실 아무리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말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애써 투명인간이 안 되는 것을 안 보고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인류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트레바리를 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투명인간처럼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곳이기도 하니까요.
매번 놀러 가고 싶었는데 다른 모임하고 겹쳐서 못하다 이번 달만 시간이 허락되어 독후감을 용기 내서 써봅니다ㅎ
(p.222의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예시에 빵 터졌네요. 모두 학원에 보내는 선택이 죄수의 딜레마라니.. 저도 동참하게 될 것 같아 씁쓸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유혹이 뭉게뭉게 생겨납니다. 하나는 오로지 나에게만 주목하고자 하는 유혹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투명인간처럼 여기고 싶은 유혹입니다. 인류 원리는 이 두 가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조언합니다. 내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지도 말고 내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p.408
둘 중 하나의 유혹이라고 하면 투명인간처럼 여기고 싶은 유혹이 맞습니다. 주목받고자 하는 유혹보다는 투명인간처럼 관찰하고 싶은 유혹이 지금의 나랑 맞다고 느껴져요. 사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세상이 나에게 친절하지 않다고 느꼈고 사실 지금도 딱히 친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고 없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죠. 지금은 아닙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향을 줬고 그 영향으로 인해 바뀌는 계기가 됐다는 말이 큰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나로 인해 누군가의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생기게 됐어요. 누군가라기보다 내 시간과 애정을 쏟아부을 사람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