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일베들의 시대>를 읽고
올 한 해 동안 생각할 단어로 '불안'을 꼽았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어떤 위기감으로부터 즉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래 문장처럼 민주화 이후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겁니다. 요즘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큰 우여곡절 없이 학생 때 공부하고 대학을 잘 다녔다면 취업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비슷하겠죠. 그런데 삶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으면서 좌절을 느끼게 되고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방어기제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자유로 인해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네오라이트는 민주화 이후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좌절된 데서 오는 반동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일베는 이러한 현상 안에 포괄된다는 것이다. p.11
책에서 불안을 내사화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불안의 원인이나 이유를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능력주의를 옹호하게 되는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경직된 사회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원인을 찾지 못하기도 하고 다양성 조차 계층에 따라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있습니다. 최근에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를 여러 사람이 추천하더라고요. 죽도록 노력해서 평범해지고 싶다거나 평범 네러티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고군분투 그리고 불안을 내사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잘 다뤄져 있다고 해서 볼까 생각 중입니다.
자유가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최근의 일입니다. 근대를 상징하는 현상이라고도 생각되는데 자유를 소화시키고 있는 과도기적인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이름이 자신을 착취하게 되었다는 한병철 님의 표현이 너무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적 배경에 따라 일베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자유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네오와 위의 네오라이트가 같은 의미인 것 같네요)
보통 자유를 이야기할 때 책임이 동반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표현의 자유는 어떤 형태의 책임도 거부한 채 표현을 받아들이는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식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라는 속담 표현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를 통해 타자와 적이 사라지고, 자유의 이름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피로사회를 정의했다. 이때 한병철은 적이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를 헤겔적 논지에서 부정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보는 한편, 에로스의 전제인 타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개인에게 '달콤한' 나르시시즘만이 남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는 더 이상 분노할 대상도, 연대할 대상도 없이 체계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p.225
한병철 님이 이야기한 '달콤한' 나르시시즘이 평범 내러티브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현대 사회를 살아갈 때 자신 만의 시스템을 종교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는데 평범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각자도생을 하기로 정한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각자도생의 윤리는 평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또 다른 도덕적 정당화 기제인 능력주의를 만나 패자를 멸시하고 승자를 물신화하는 데 이른다. 270
각자도생의 윤리는 일견 스스로를 책임지고 누구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 것에서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살아갈 때 삶의 방향이나 목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채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죠. 위 문장처럼 패자를 멸시하고 승자를 물신화하는 데 이르는 모습이 많이 관찰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적으로 효율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장 효과적으로 어떤 일을 하거나 성취를 하려면 시간을 단축하거나 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사회는 효율성을 추구한다고 좋아지지 않잖아요. 물론 제 의견에 반대하실 수 있습니다. 사회가 좋아진다는 기준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여기에서 그 이야기를 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 정도만 이야기해 봅니다.
능력주의라는 단어를 창안한 마이클 영이 그 개념의 창안과 동시에 예견했듯이,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 아래서 모든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달린 문제가 된다. 신의 은총, 운, 사회적 배경과 같은 문제는 부차적으로 여겨지거나 종종 무시된다. 모두 각자가 뿌린 대로 거뒀을 뿐이며, 제대로 수확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씨앗을 뿌린 무지의 소치이거나 제대로 돌보지 않은 나태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 실패란 곧 노력의 부족이자 도덕적 파탄이 된다. p.334
평범 네러티브로 시작했지만 결국 평범을 탈출하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인 목표일 것 같아요. 그런데 평범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생각해봤어요. 조그만 성취를 여러번 하면서 평범함에 안주하기 보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형태의 삶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자존감을 가지게 되면 평범함이라는 단어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런 조그만 성취조차 상황에 따라 전혀 가지지 못할 수 있다고 느꼈어요. 다양성조차 계층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하는걸까 생각하게 만드네요.
책의 제목이 '보통' 일베들의 시대잖아요. 누구나 일베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어쩌면 나는 아니야라고 손사래칠 수도 있을 겁니다. 예전 2차 세계대전의 독일시민들이 처음에 나치당을 지지할 때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해 봐요. 나치당의 득세에 대해 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고 아포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만연했다는 것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다음의 전쟁의 형태가 예전처럼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형태로 지금 우리 주변에 가까이 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기도 하거든요. 지금 우리는 깨닫지 못했는데 나중에 뒤돌아보면 결국 모두가 같이 파멸로 가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너무 확대해석한 것일 수 있지만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거대서사를 이용해 봤습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던 무함마드 유누스는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것이고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엄청날 것이라고 이야기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현상이 지금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지만 무시하고 지나쳐버린다면 언젠가 큰 폭탄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데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그저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나아진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바꾸는 것은 어렵잖아요. 가장 바꾸기 쉬운 나부터 바뀌어야겠죠.
구조적으로는 소셜믹스가 이루어지는 공간설계라던지 커뮤니티를 조성할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을 읽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죠. 구조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가 항상 따로 갈 순 없는 것처럼 해결방법도 두 가지 모두 병행될 때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유태인 학살 사건과 같은 비극이 지금 이 시대에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