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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Nov 22. 2022

자립이라는 허상

<가난의 문법>을 읽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인들과 지역사회가 상호의존하는 계기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근근이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자립보다, 함께 모여 서로에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 p.229


 자립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1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섬.

2 스스로 제왕의 지위에 섬.

 과연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그런 시기가 아예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 수렵채집 시대 때에도 소규모 무리를 이루어 생활을 했다고 하잖아요. 위 문장에서 서로에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자립이라는 단어를 이상향처럼 쓰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맞지 않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립은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데 의존하는 자립이라뇨.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자립'을 추구하고 '자립'을 상품화했던 것인가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녀에게 노숙자를 보면서 이런 삶을 살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요즘 드는 생각은 한국사회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것 때문에 지불하는 비용이 꽤나 크다는 것이에요. 아무래도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성장하기 위해 잠시도 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요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있자니 의문이 들더라고요. 독일도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는데 왜 우리나라의 지금과 독일의 지금이 이렇게나 큰 차이가 나는지 말이죠.

 제가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1>에서 느낀 점을 간단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독일의 첫 번째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는 독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습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게 경제를 살리기 위한 시기가 있었죠. 그 이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과거에 독일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을 여러 나라와 진행하고 경제발전으로 이룩한 사회 인프라를 다 같이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확립합니다. 바로 이 시기가 우리나라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지금이라도 사회적 논의를 거쳐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너무 힘들다는 현실적인 충격 때문인 것 같아요. ('유치원' 충격에 대한 것은 따로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사실 너무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이면서 다루기 민감한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에 맞는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제는 나이도 실패의 항목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골린이’라는 단어에서는 어린이를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꼰대’가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고 쓸데없는 소리만 한다는 인식이 많아졌다고 느껴집니다. 사실 여러 가지 단어가 내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각해보면 많더라고요. 결국 사회적 분위기를 어떤 방식으로 바꿀 수 있는지 방법이 궁금해졌습니다.


빈곤을 판매하고 상품화


 위에서 이야기했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실패를 용인하지 않기 위해 빈곤을 판매하며 그것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성공한 인생을 살며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하지 않은 행운을 기부나 안도감으로 포장하고 그들을 타자화하는데 굉장히 능숙해진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빈곤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한 개인이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기부나 자선사업으로 부채감을 덜어내 주는 고해성사와 같은 시스템을 만들어놨습니다. 아래 글처럼 정작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해 인식하고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빈곤의 쓸모

 몇몇 사람들의 막연한 연민과 감동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 '사회를 위한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라서다. 대개는 연민을 느끼고 동정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동인 경우가 많다. 흔히 연민은 기부와 같은 자선사업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기부는 세상을 바꿀까? 여기에서 바우만의 이야기가 떠올라 옮겨본다. 바우만은 사람들이 기부나 자선활동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빈곤층을 인도주의적 관심의 대상으로 제시할 경우, 이들이 처한 운명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분노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출된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된다고 했다. 가난한 노인의 문제는 연민과 감동, 그리고 기부와 자선사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건 '안전한' 자선활동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인식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더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우만이 이야기한 사회에서의 '빈곤의 쓸모'다. "세계의 빈곤층과 한 나라의 빈곤층은 일자리가 있고 정기적으로 소득이 있는 이들의 자신감과 의지를 매일매일 조금씩 좀먹는다. 빈곤층의 처지를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이 체념하게 되는 현상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빈곤층의 처참한 삶을 보면서 여유로운 삶은 보장된 것이 아니고 오늘 성공했다고 내일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게 타당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자신의 상태를 상기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을 가지는 데 급급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조용히 지나쳐버리고 덮어"버리는 "잘못"이 그 마지막 아니겠는가. 우리는 누군가의 가난을 보며 사회 체제의 불안정함과 미비함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깨달음은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스스로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신하고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빈곤층의 존재란, 끊임없이 불확실성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소비자'의 삶이 야기하는 혐오스럽고 끔찍한 결과를 상쇄"하는지도 모른다. 바우만이 이야기한 '빈곤의 쓸모'는 일견 잔혹한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머물지 말고 '사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도 하다. p.207-209

자립이라는 허상


조문영(2019)은 '자립'이라는 말에 오해와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자립이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임금) 노동을 신화화한 한국 사회에서 정부가 여전히 지원의 명분으로 삼는 정당성의 언어이자, 개인들에게 자발적 책무를 부과하는 통치 전략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바라는 활동가들의 바람의 언어"로 아주 복합한 프레임이 됐다. 어떤 주체가 말하는 자립이건, 경제적인 면에 치중한 나머지, 사회와 마을, 이웃에 의존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우리는 이 '자립'을 탈구축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자립'이란 개인의 독존이 아닌 상호의존을 기초로 해야 한다. p.229


 어려서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숙제를 스스로 할 수 없도록 부모님의 숙제로 전락해가는 과정의 아이러니가 우리 사회 곳곳이 포진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자립'이라는 단어를 폭력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학문적인 습득보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어루만져주는 것이 더 중요한 신체발달 시기를 보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자립이 안되어 있으면 다닐 수 없는 유치원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책무를 부과하는 통치 전략을 사용하는 유치원이라니 대체 무엇을 위한 교육이 지금 이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인가요. 자립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왜 제목이 '가난의 문법'일까?


 문법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난'이라는 규칙과 그것을 연구해봤다는 의미를 주기 위해 제목을 '가난의 문법'이라고 지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말의 구성 및 운용상의 규칙. 또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        

 결국 우리나라의 50% 정도의 비율로 가난의 문법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가능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당장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미 지금도 노인빈곤율을 살펴보면 50% 정도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위소득의 50% 이하를 벌고 있는 비율이 노인빈곤율이라고 했을 때 문제가 심각하지만 우리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체감하기 힘듭니다.

 실질적으로 노인이 되는 시점에는 소득이 낮을수록 건강이 안 좋을 확률이 높아지고 갈 곳이 없어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인들이 갈 수 있는 곳을 상상해보면 노인정이나 길거리 벤치, 지하철, 공항 라운지와 같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용공간들입니다. 이마저도 최근에 생기는 아파트 단지나 기존에 있던 노인정도 다른 용도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고립의 시대>라는 책에서도 고립되는 상황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고 고립된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알 수 있잖아요.

 사회적으로 노인이 되어서 '가난의 문법'을 따르지 않게 하려면 커뮤니티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 책을 읽고 이야기한 '트레바리'라는 커뮤니티처럼 말이죠. 노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공간을 돌려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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