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
5,892m,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북동부에 있는 성층화산으로, 키보, 마웰시, 시라 등 3개의 봉우리가 있다. 최고봉인 키보산 정상에 분화구가 있고, 분화구 남쪽으로 너비 1.9㎞, 수심 300m의 칼데라가 있다.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과 루드비히 크라프가 최초로 발견했고, 1889년 독일 지리학자 한스메이어와 오스트리아 산악인 루드비히 푸르첼러가 최초로 올랐다. 한국인 최초로는 1981년 산악인 전명철이 등정했다.
킬리만자로.
해발고도 5,892m, 아프리카의 최고봉.
국민가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히트를 치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 됐다. 이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례 ‘킬리만자로’ 하면 표범을 떠올린다.
“킬리만자로엔 진짜로 표범이 있을까?”
그렇다.
1928년 영국탐험대가 킬리만자로 정상 부근에서 표범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에 대문호 헤밍웨이는 “왜 표범이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건조한 글귀 속엔 고독이 사무친다.
마사이족은 킬리만자로의 서쪽 정상을 ‘응가예 응가이’라고 불었다. ‘신의 집’ 이라는 뜻이다. 역시 왠지 모를 고독의 의미가 물씬 전해졌다.
놀랍게도 킬리만자로가 우리나라에 알려진지 600년도 더 됐다. 조선 태종 때 제작된 지도 ‘혼일강리대역국지도’에 킬리만자로가 ‘달의 산’이란 명칭으로 떡하니 등재돼 있다. 킬리만자로를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하얀 산’이라고 하는데, 이와 의미가 유사하다. 훨씬 전부터 교류하던 아라비아의 지리학 관련 서적이 전해지면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에까지 그 존재를 알린 것이다.
작은 원정대
그동안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5,642m),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42m), 북미 최고봉 데날리(6,194m)를 올랐다. 이번엔 네 번째 대륙으로 아프리카를 향했고 결정은 데날리 정상에서 결정된 원정길이다.
킬리만자로는 만년설이 적어(최근 20년 간 80%가 사라졌다) 다른 곳보다 오르기가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당당하게 세계 7대륙 최고봉 중 하나이다. 온도차가 영하 30℃~영상 50℃나 되는 무지막지한 기온차가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실제 등정 성공률은 50%에 불과했다.
월급쟁이 직장인 등반가에게는 항상 ‘비용’이 문제다.
매번 원정에 나설 때문에 이 어려운 난제를 피할 길이 없었다. 더불어 전문 원정대를 꾸릴 수 없으니 같이 갈 사람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엔 경비는 어디서 구하고, 사람은 어디서 찾나?”
킬리만자로는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아 최소규모, 최저비용으로 다녀오리라 계획했는데, 막상 같이 갈 사람이 마땅치 않다.
그러다가 뜻밖의 동반자를 찾았다.
고향 남원 또래 모임(우림회)에 회장직을 맡은 허준영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까지 것, 대신 자네도 내 부탁 들어주게,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를 같이 가자.”
지나가는 말 한 마디가 씨가 됐나, 이 친구가 진짜 킬리만자로로 같이 가게 될 줄이야!
이렇게 원정경험 없는 친구 준영이, 2000년 히말라야 초오유 등반을 같이했던 재수형, 여행사 대표이신 태삼형과 단촐한 원정대가 꾸려졌다.
입구에 서다
2005.12.21.
크리스마스를 앞둔 21일 인천공항을 날아올랐다. 뒤숭숭한 마음과 달리 몸은 홀가분했다. 장비와 물자는 현지에서 구입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7대륙 최고봉 원정의 시작, 기나긴 비행과 그보다 더 지루한 환승절차다. 케냐를 거쳐 탄자니아로 가기까지 3일이 걸렸다. 킬리만자로로 가기 전 중간에 모시(Moshi)라는 도시에 들러 등반에 필요한 장비와 물자를 구입했다. 장비를 갖추니 정신이 번쩍 든다.
킬리만자로 산길을 보수 중인 모습 2005.12.24.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흥겨움이 한창일 쯤 우리는 킬리만자로 초입 마랑구게이트((Marangu-Gate)에 도착했다. 공원관리사무소에서 입산신고를 하고 긴단한 점심식사를 마쳤다.
마란구게이트 - 킬리만자로 관리사무소 입산 신고소 포터들을 만나 짐을 분배하고 곧 길을 나섰다. 오늘은 이곳 마랑구게이트(1,800m)에서 만다라산장(2,750m)까지만 오르기에 고소에 대한 걱정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프리카 같지 않은 아프리카의 길을 걸었다.
TV로 보던 아프리카는 이글거리는 황량한 대지에 잡목이 드문드문 있을 뿐인데, 이 길은 하늘을 가리는 빼곡한 열대림이라니, 좀 낮설기 까지 하다. 특히 숲길에서 본 ‘훗포카’라고 불리는 꽃이 인상적이었고 나무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 꽃은 꼭 수선화를 빼어 닮았다.
"프로테아" 검은대륙의 핀 백화
어느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프리카의 무더위가 실감난다. 끈적대는 땀이 고역스러워 차라리 눈 덮인 고산이 그립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나는 캠코더를 들고 선두와 후미를 오가며 열심히 기록영상을 담았다. 영상촬영은 이제 내게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로 즐거운 일이 되어 있다.
아프리카의 향기
2005.12.25
크리스마스 아침을 만다라대피소에서 맞았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이다. 하루 만에 고도를 1,000m나 올리는 날이다. 목적지는 호롬보대피소(3,700m). 서서히 고소의 두려움이 스멀거렸다.
삼림이 울창했던 어제와 달리 사막구간을 거쳐 전형적인 고산지대를 만나니 아프리카 최고봉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점심때부터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칠 줄 알았던 우박은 오후 내내 쏟아져 내리며 순조로운 운행은 물건너 갔고 더딘 발걸음으로 오후 늦게 되어서야 목적지 호롬보대피소에 겨우 도착했다.
첫 원정 길인 친구와 장대비를 맞으며 걸었다
이쯤 되니 우려했던 것처럼 다들 어질어질하고 메스꺼운 고소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 때 일단의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다. 의식 없는 어느 외국 원정대원을 외발이 부착돤 리어커에 싣고 후송하는 중이다. 다급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그들을 보는 우리 역시 괜한 걱정이 들었다.
“저 지경까지 가버리면 안 될 텐데….”
높은 곳에서 고소증세는 당연하다. 다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천천히’가 관건이었다.
만다라 산장
적응하기
2005.12.26
아프리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싸늘한 아침을 맞이했다. 일출영상을 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앞 봉우리까지 오르는데 숨이 턱~막혔다.
“너무 서둘렀나? 천천히, 천천히.”
다행히 해는 아직 지평선 아래에 머뭇거리고 있었고 장비를 드리우니 드디어 해가 솟아 오른다. 그 모습은 마치 지리산 천왕봉에 있음을 착각하게 유사한 일출이다. 다만 국내에선 볼 수 없는 광활한 대지와 보다 새빨간 빛이 달랐다. 구름 위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케냐산(5,199m)이 뾰죡 솟아 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고소 적응을 위해 4,000m 고도 얼룩말 바위 까지 고소순응을 다녀 왔다. 어제 부터 내리던 비는 오락가락 하며 오늘도 계속 연이어져 옷가지와 장비들이 눅눅하다.
“차라리 눈이 내리면 좋으련만….”
다른 곳 같으면 눈이 내릴 고도지만, 아프리카라 상항이 다르다. 지금은 킬리만자로 정상에도 눈이 별로 없다 한다.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눈 쌓인 킬리만자로를 처음 발견하고 소식을 유럽에 알렸을 때, 유럽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적도에 만년설이 덮인 산이 존재할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정상 부근에 수 ㎞의 만년설이 존재했다. 지구가 따듯해지고 있는 지금은 대부분 녹았지만.
고소순응을 마치고 돌아와 점심을 준비하는 포터의 조리실을 우연히 들렀다. 조리실이라고 해봤자 판자를 이어붙인 벽에 함석지붕을 덮은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 팀을 비롯해 다른 원정대의 쿡들이 뒤엉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비위생적이고 어지러운 식당 상황을 보고선 “아…. 점심식사를 해야 하나? 굶을까? 비상식을 먹을까?” 잠시 고민을 했다.
문든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거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점심식사는 그들의 성의에 감사한 마음으로 임했다.
음식을 준비중인 쿡들-카메라만 들이대면 밝게 포즈를 취해주는 고마운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