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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영조 Oct 10. 2018

빈슨매시프(2)
블리자드의 환영

세계 7대륙 최고봉 원정의 기록

신세계로    


5일 새벽, 버스에 오르니 어제 브리핑 때 봤던 외국 대원들이 이미 타고 있다.

버스는 곧 푼타아레나스 비행장으로 향했다.     

칠레에서 남극으로 가는 것은 엄연히 외국행이기에 여권을 소지하고 출국신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갈 곳이 남극뿐이라서 그런지 복잡한 수속절차는 없었다.

새삼 2004년 데날리 원정길에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서 치를 떨던 까다로운 절차가 떠오른다.    


남극은 여객기 항로가 없고 비행장도 없다.

그냥 평평한 얼음 위에 착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극행 비행기는 러시아 군용기를 민수용으로 사용한다.

러시아 군용기는 전시에 활주로가 파괴될 경우를 가정, 노지 이착륙을 전제로 만들기 때문에 랜딩기어가 무척이나 튼튼하다.     

그래도 명색이 민항 여객기인데, 비행기에 오른 나를 당황시켰다.

아늑한 것을 기대하진 않았건만, 아예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래도 화물이 없는 공간에 자유로운 자세로 앉는게 은근히 편안해 다행이었다.

남극발 수송기(일루신). 태생은 러시아 군용기. 짐과 뒤엉켜 마젤란해협과 드레이크해협 넘어 남극으로 향한다


이륙에 앞서 덩치 큰 사내가 뭐라 뭐라 안전사항을 전달해주는데, 거대한 엔진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묵직하게 날아올라 4시간을 비행했다.

작은 창밖으로 하얀 평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윽고 착륙할 모양이다.

아무런 시설도 없는 페트리어트힐의 얼음벌판 위로 제법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도어가 열리니 유명한 남극의 눈폭풍 블리자드(blizzard)가 매섭게 우리를 환영한다.     

남극에 발을 딛는 순간 괜히 울컥했다.

남극 도착. 천연 얼음 위 비행장에 무사히 내렸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땅이었다.


내가 이곳을 오기 위해 고민했던 지난 시간들이 눈보라 곁을 획획 스쳐지나갔다.

이곳 천만년의 빙하 위에서 난 그저 미미한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한 것 같았다.

지난 원정을 되새기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설상차를 타고 유니언글레셔캠프로 이동했다.

유니언글레셔캠프는 남극을 찾는 지구촌의 탐험가와 모험가들이 잠시 머물다가 각자의 여정에 따라 흩어지는 터미널 같은 곳이다.

캠프 주변에는 마치 지뢰지대경고판 같은 출입금지 표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이는 남극의 환경파괴를 막고, 또 한편으론 주변에 은폐된 크레바스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장 먼져 맞이한 크레바스. 지구의 어느 곳을 가든 마주친 운명이라 숙명으로 받아들고 친한 친구처럼 맞이하자.!  


이곳에서 또 다시 남극에서의 규칙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이제 생활습관도 바뀌어야 한다.


이곳은 백야 때문에 밤과 낮이 따로 없이 항상 밝다.

스스로 취침, 식사 등의 시간을 정해 잘 지키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한국과의 시차가 12시간이나 됐지만, 나는 비교적 쉽게 적응했다.


다만 여기에서는 용변을 아무데나 볼 수 없었다.

용변은 반드시 정식으로 설치된 화장실만 이용해야 하고, 텐트 안에서도 소변통을 사용해야 했다.

캠프에서 생활하며 오로지 기상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이동의 순간이 빨리 다가오길 기다렸다.    


외계행성    


6일, 유니언글레셔캠프 생활 이틀 만에 날씨가 좋아졌다.

거곧 이날 오후 빈슨매시프베이스캠프(2,100m)로 이동이 확정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운이 좋다.

계속 일정이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고대하던 빈슨매시프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높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쳐져 캠프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악명 높은 남극의 지독한 추위도 아직은 견딜만하니 다행이었다.

등반일정을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 내일 출발키로 했다.    


베이스캠프 도착 하루 만에 썰매와 물품을 보완하고 로우캠프(2,700m)로 향했다.

썰매가 묵직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다른 원정대도 서로 거리를 두며 만년빙하지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는 길 곳곳에 크레바스와 눈사태위험지역이 있어 긴장감이 돌았다.

게다가 그동안 별것 아닌 것 같았던 남극의 추위가 비로소 실감나기 시작했다.

남극의 이미지는 오로지 세가지. 검은 암질의 산, 하얀 만년설, 백야와 파란하늘.


노출된 피부가 아프고, 손가락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워졌다.

오늘 아침식사를 억지로 먹은 게 거북했는지 체기도 있어 몸이 더욱 긴장됐다.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맹추위와 낮아진 산소농도는 생각을 둔하게 만들었다.

위기상황에서 빨리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이런 조건에서는 판단이 느려져 불의의 사고를 맞기도 한다.

실제 많은 산악인들이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발견한 그들의 유품을 보면 대게 여분의 에너지나 장비가 배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게으름은 곧 죽음이다.”

   

스스로 다짐했다.    

포근한 것 같았던 날씨가 바람과 구름의 영향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곳이 남극이었다.

서둘러 추가 보온조치를 하며 ‘게으르면 죽는다’라는 수칙을 되뇌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고르기를 했다.

로우캠프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빈슨매시프의 능선이 우리를 가련한 듯 내려 보고 있었다.


생명체라곤 우리 뿐인 얼음길을 7시간이나 걸어서야 드디어 로우캠프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침낭에 들어갔다가 나도 모르게 골아 떨어졌다.    


포기하고플땐 어떻게 나를 달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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