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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영조 Oct 25. 2018

빈슨메시프(3)
남극일기의 마지막

세계7대륙최고봉원정의기록

7시간의 설벽    


8일, 눈을 뜨니 아침 햇살에 비친 텐트 위로 하얀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성애가 덮여 있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움직일 때마다 그 하얀 가루가 내 얼굴로 떨어지는 데, 차가운 느낌이 서늘하다 못해 섬뜩했다.     

오늘 올라야 할 설벽이 보였다.


5년 전 데날리 등정 때 올랐던 헤드월 구간과 흡사할 것 같았다.

내키지 않는 오트밀로 대충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동 준비를 했다.


설벽에 가까이 가니 이미 픽스로프가 걸려 있다.

등강기로 주마링(jumaring)을 하면 되겠는데, 높이가 만만치 않아 힘 꾀나 들여야 할 것 같다.     


코스를 가늠하고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한참을 올랐다 생각하고 내려 보면 별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위를 올려 보면 언제나 까마득했다.     

몇 시간을 로프에 매달려 아등바등하니 비로소 빈슨매시프  마운트신(4,661m)의 거만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운트신 아래로 수천 길의 바위절벽이 뻗어 있어 그 웅장함을 배가시켰다.

뒤에 보이는 게  남극에서 두 번쨰로 높은 "마운트 신"이다.


캠코더를 꺼내 내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부지런히 담았다.

추울수록 게으르면 안 되기에 영상녹화도 더 꼼꼼하게 했다.

행여 강추위에 손가락이 마비될까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촬영을 하다 보니 문득 ‘참 눈이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극대륙에 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본 것이라곤 하얀 눈과 그 사이를 드문드문 가로지르는 검은 산줄기였다.

덤으로 새파란 하늘과 지지 않는 태양이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들락날락하며 미약하나마 온기를 전해주었다.    

로프에 매달려 무려 7시간을 중력과 싸우니 눈 앞에 하이캠프(3,800m)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로 눈길을 돌리니 저 아래 로우캠프가 점이 되어 보인다.

7시간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끝이 없다. 포기하면 실패고 도전하면 성공이다.


최대한 바람 덜 맞는 곳을 찾아 텐트를 치려는데 자리가 마땅치 않다.

임시방편으로 눈 블록을 만들어 성벽처럼 쌓고 텐트를 쳤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할 때부터 느껴지던 체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약간의 기호식품이라도 준비 못한 것이 그렇게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간단하게 따뜻한 차로 식사를 대신하고 침낭 속에 파묻히는 걸 택했다.    


단지 태양의 위치가 조금 바뀐 것으로 9일 아침을 맞았다.

그런데 오늘도 계속된 체기로 하루를 불편하게 시작할 참이다.


마지막 공격캠프. 한밤중에도 해는 중천이다.


약간의 휴식후 저녁에 정상등정을 시도 해야 한다.

힘을 쓰려면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억지로 먹으려니 체기만 부추겼다.

먹는 것이 없으니 용변 보는 일도 줄어 약간의 수고는 덜었다고 해야 하나.

남극에서의 용변은 반드시 배급받은 녹말봉지를 이용해야 해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문득 새콤한 동치미국물과 얼큰한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났다.

낮에 침낭 속에서 잠을 청해보지만 몸과 마음이 뒤숭숭해 뒤척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예정된 출발시간 오후 8시가 되었다.    

피부가 너덜너덜 벗겨졌다. 게으름의 징표다.


꼭 와야할 곳    


백야로 밖은 여전히 낮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길을 나섰다.

살랑바람이 부는데, 남극의 살랑바람은 두터운 우모복을 관통해 겨드랑이까지 파고드는 송곳이었다.


강풍이 아닌데도 입술이 꼬독꼬독 불편해지고, 노출된 볼은 뜨끔뜨끔 갈라지는 것 같았다.

평범한 날씨인데도 이 정도라니. 7대륙 최고봉 통틀어 이런 극한의 환경이 또 있을까?    


체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허기로 이어졌다.


문득 3년 전 에베레스트 등정 때 겪었던 극심한 체기가 생각났다. 제2캠프에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가는 동안 속을 뒤집는 고통으로 무척 힘들었었다.    


“그 때랑 비교해보면 지금이 그나마 좀 낫지 않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초콜릿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북쪽을 휘감아 서쪽능선으로 올라서니 어제 보던 마운트신이 발아래 있고, 그 너머로 또 다른 영봉이 펼쳐져 장관을 이뤘다.


다시 발아래를 집중했다.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천길의 설사면에 언제 나뒹굴지 모른다.


끝이 없어 보이는 능선과 설벽은 가다보면 가로막고, 타고 넘으면 또 설벽이 나오고 또 능선이 나오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추위는 당연한 시련이 됐다.  음료를 마실 분위기도 아니다. 혹 입술에 달라 붙기라도 한다면 낭패다.


잊고 걷자 암시를 하며 오르는 그 어느 순간 공기와 시야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알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기가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능선일 것이라 직감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관문, 저 봉우리를 넘으면 능선의 시작이다. 마니석에 새겨진 윤회처럼.


2010년 12월 10일 오전 3시 30분.

캠프를 나선지 7시간 만에 남극대륙 최고봉 빈슨산(4,895m)에 올랐다.

남극 정상은 다른 곳처럼 번잡하지 않아 좋았다.

여유있게 시간을 보낼수 있었다.

단지 추위를 견딜만 하다면.


많은 사진을 담았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염원이 담긴 것들이라 소홀할수 없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고민했던 갈등은 시원하게 날아갔다.

동시에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의 고비를 또 하나 넘겼다.


여느 때처럼 내려서기가 아쉽다.

오고 싶어도 올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그런가 보다.


하지만 뒤돌아 보지 않고 내려가리라.

이제 공기가 풍부하고 온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Good buy Vinsonmassif and Antarctic. 


남극을 나온 우리, 남극으로 갈 박영석 대장과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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