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스텐츠(Mount Carstensz) 푼착자야((Puncak Jaya)
칼스텐츠, 인도네시아 말로 푼착자야.
인도네시아 파푸아주에 있다.
1623년 파푸아뉴기니를 탐험한 네덜란드인 얀 칼스텐츠(Jan Carstensz)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가,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 후 수카르노로 개칭됐고, 현재는 푼착자야로 불리고 있다.
해발 4,884m로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인도네시아가 아시아에 속해 있어 파푸아뉴기 빌헬름산(Wilhelm, 4,509m)가 오세아니아 최고봉이라는 견해도 있다. 더불어 호주 코지어스코산(Kosciusko, 2,228m)을 오세아니아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리안자야는 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 경계지역에 있다.
칼스텐츠 남면은 암벽이 거의 없는 평지에 정글과 늪이 많다.
반면 북면은 3,000m가 넘는 직벽이고, 윗부분은 적도임에도 거대한 빙벽이다.
등반로는 북면 13개, 남면 3개를 주로 이용한다.
등 모두 16개가 있다.
첫 등정 1837년 오스트리아 탐험가이자 작가인 하인리히 하러가 했다.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산이기에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다.
원정을 앞두고
비 내리는 주말 아침.
출근길 내내 이번 원정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우선 이번 등정을 성공하면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의 심리적 부담을 떨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7대륙 최고봉 원정을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니, 내가 성공하든 말든 뭐라고 할 이도 없을테지.
하지만 이것은 내가 처음 산을 오를 때부터 몸과 마음에 각인된 숙명이었다.
당초 세계 5대륙 최고봉을 목적으로 했지만, 지금은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7대륙 최고봉 등정은 13년 동안 끊임없이 노력하고 염원한 내 투혼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가슴앓이와 물적 부담때문에 고민했던가.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고, 그런 목표를 세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었지.
이런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게 다 힘들었지만 그중 제일은 역시 원정비용.
속된 말로 집 한 채를 말아먹었을테니.
이번 등정이 끝나면 꽤나 허전할 것 같다.
내 목표가 끝난다는 아쉬움이 생겨날 것이고, 또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하는 두려움도 있을테지.
이번 원정을 준비하면서 칼스텐츠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코시어스코(Kosciusko)를 선택해 쉽게 끝내버릴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코시어스코를 올라도 세븐 서밋(7-summit)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의미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반쪽 완성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과정은 어렵겠지만 완벽하고 깨끗하게 세븐 서밋의 대미를 마치는게 후련할 것이다.
이번 원정 준비도 만만치 않다.
비용만 2000만 원에 육박한다.
사실 이번 원정 결정은 지난해(2013) 돌아가신 어머니 음덕 때문이다.
당시 부조금 700만 원이 종자돈이 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와이프는 이 사실을 모른다.
이 글을 통해 알게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불안하지만, 나 혼자 영원히 묻어두는 것은 본질을 감추는 것이기에 이렇게 쓴다.
어머니 음덕으로 마련된 비용이 종자돈이 돼 내 인생목표 14년 여정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었다.
칼스텐츠.
인류 최후의 원시마을.
열대우림부터 만년설까지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
가는 곳은 항상 미지의 세계.
국내 산행을 한다면 목적지까지 과정이 머릿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이번 원정은 매 순간 부딪혀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곳. 파푸아에서 우미라고 하는 움막. 원시적 수혈주거 가옥이며 가축과 공동생활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곳, 낯선 사람들.
11월 10일
인천공항.
공항버스에서 내리니 시간이 촉박하다.
혼자 떠나는 원정이라 약간 겁이 난다.
혼자가 되니 쓸쓸하고, 허전하고, 막막하다.
게이트를 통과한 후 조금의 여유도 없이 바로 인도네시아 가루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4년 동안 꿈꿔온 세븐 서미트 대미를 장식하러 가는 산행,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긴장되면서도 설렌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하는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에베레스트처럼 정보가 많지도 않다.
이럴 때 나를 믿어야지. 나의 뚝심을 믿어야지.
발리(Bali)에 도착했다. 후텁지근하다.
기착지 발리
우리나라가 벌써부터 그립다.
날씨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과 문화도 너무 낯설다.
말투도 그렇지만, 역한 향신료 냄새가 매우 그렇다.
공항에서부터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앞으로 이곳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이다.
더러 한국인 신혼부부가 보이지만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다.
국제 휴양지 발리. 잠시 거치는 상황이 아닌, 여유있는 여행길이라면 좋으련만.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미팅보드로에서 현지인을 만났다.
초면이라 약간 어색하다.
숙소로 가기 전 300 달러를 루피로 환전했다.
1달러 당 12,000루피니 상당한 부피다.
그렇다고 물가가 싼 것도 아니다.
이곳 발리에서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
라니 호텔에서 현지 가이드와 몇 가지 정보를 교환하고 이틀 후 만나기로 했다.
이제부터 진짜 혼자서 묵언수행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묵언수행 승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렇다고 마냥 방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지.
주변을 알아볼 겸 밖으로 나간다.
여기저기서 오토바이를 탄 여행가이드가 소리를 질러댄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모두 일본산이다.
“너, 일본사람이냐?”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제로인 내게 일본인이냐 묻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환전소에서 일본돈과 중국돈만 환전 해주고, 한국돈은 안 된단다.
이번엔 중국 때문에 불쾌하다.
호텔에서 얻은 지도를 보며 험악한 느낌의 도로를 해쳐가니 제법 큰 센트럴쇼핑샾이 나온다.
그 뒤로른 널따란 남태평양이 펼쳐져있다.
바닷가를 홀로 걷다가 일몰을 맞았다.
이곳 석양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했다.
바로 옆 국제비행장에서는 비행기가 쉴새 없이 뜨고 내린다.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데 이미 온 신경이 이곳의 특유한 그 냄새를 거부하고 있다.
거리음식은 엄두도 안 난다.
호텔식당이 그나마 나을까 싶어 갔다.
향신료를 최대한 넣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갈비와 밥과 빈탕맥주를 주문한다.
약간의 향신료 냄새가 흠이지만 그래도 먹을 만 하다.
어쨌든 한 끼를 해결했으니 만족이다.
무더운 기온때문에 등이 항상 축축하다.
밤에는 열대성 스콜이 세차게 내려 시원한데, 극성스런 모기때문에 문을 함부로 열수 없다.
다행히 에어컨이 빵빵하게 작동한다.
빈탕맥주 두 병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잠을 청한다.
11월 12일
저녁 12시 이리안자야(Irian Jaya) 티미카(Timika)로 이동한다.
카고백을 몇 번이나 열고 닫아 17kg 무게로 정확히 맞췄다.
오버차지가 엄청나게 나온다고 해 그마나 조금만 챙겨온 식료품은 거의 빼버렸다.
옷과 배터리도 줄였다.
라면도 면은 버리고 스프만 5개 챙기니 간신히 17kg가 됐다.
오전과 오후 한 차례 미리 파악한 주변을 돌아다녔다.
저녁이 되자 식사를 하러 외국 원정대가 속속 모인다.
이들 또한 나처럼 세븐 서밋을 목표로 찾아온 산악인들이다.
국물 있는 음식을 골라 주문했지만 향신료 냄새가 엄청나서 먹질 못한다.
오후 10시경 나와 외국 원정대를 태운 버스가 공항으로 이동한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자정, 드디어 이리안자야 티미카로 떠난다.
비행시간 3시간 40분, 꽤 먼 거리다.
이리안자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섬의 서쪽에 있는 인류 마지막 원시지역이다.
원주민 땅 파푸아뉴기니와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로 국경이 나뉜다.
칼스텐츠는 이리안자야에 위치해 있어 인도네시아로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산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대규모 광산회사가 각종 광물을 캐낸다고.
규모가 어마어마하기에 칼스텐츠를 오르는 내내 그 광산의 구역을 지나야 한단다.
불행하게도 이곳은 이 엄청난 광물 때문에 항상 분쟁이 발생한다.
정글을 근거지로 하는 반정부군과 정부군 사이에 언제 교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이곳 출입은 철저한 정부 통제를 받는다.
출입을 위해서는 7개 정부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또 반드시 현지 가이드를 대동해야 한다.
게다가 정해진 등반로가 없어서 인도네시아 가이드조차 현지 원주민의 안내를 받기도 한다.
새벽녘 티미카에 도착하니 현지인 가이드 리터조시가 기다리고 있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시골터미널 같은 공항에서 빙 둘러서서 자기소개를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라 대충은 이해 하며 눈치로 판단한다.
중요한 사실은 당초 예정했던 일라가(Ilaga)코스 대신 수가파(Sugapa)코스로 변경한다는 것이었다.
걱정이다.
일라가코스 정보만 알고 있는데, 이젠 오로지 현장감각으로만 해쳐가야한다.
수가파까지는 20인승 경비행기로 이동한다.
티미카에서 까다롭게 짐 무게를 확인한다.
뺄 거 다 뺐으니 무사통과.
비행 내내 불안하다.
비행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덜컹덜컹, 마치 비포장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같다.
요동도 심하다.
불안한 마음에 창밖을 보지만 구름이 자욱해 시계가 제로다.
무덥고, 말 통하지 않고, 앞으로 계획도 막막하고, 밀림에 대한 두려움에 걱정하며 날아갔다.
비행기 밑으로 활주로가 시골길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뒤 활주로에 무사히 안착한다.
활주로란 게 그냥 맨땅을 고르고 그 위에 아스팔트 한 겹 깔고 흰 줄 하나 그어놓은 게 전부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헐... 흰 눈동자와 누런 이빨만 빼고 죄다 새까만 사람들이 구름때처럼 모여있다. 와,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먹고 자며 밀림 여행을 할까?. 속으로 연신 난 죽었다를 복창한다.
현지인과 첫 만남. 낮선 땅 낮선 문화 낮선 향 낮선 말, 모든게 흥미롭고 신기하다.
임시 숙소까지 30분을 걸어서 들어간다.
수가파 시내라는데 말만 그렇다.
한 무리의 돼지때가 난동 수준의 극성을 부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수가파 시내. 이곳을 뒤로 하고 더 원시세계로 들어간다.
숙소까지 이동하는 내내 이곳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다 받아내야 한다.
이곳엔 두 인종이 함께 산다.
인도네시아인과 원주민.
인도네시아인은 이곳으로 이주 상권을 포함한 모든 경제적 지위를 장악했다.
원주민은 좌판에서 그저 고구마, 옥수수, 기타 소량의 농산물을 팔아 연명하는 형편이다.
이곳에 비하면 발리는 천국이었다.
임시숙소에 들어가니 실내가 심각하다.
어둡고, 칙칙하고, 주변은 온통 묶은 때 투성이.
민감한 나는 어디 앉을 곳조차 없다.
임시숙소의 엉성한 나무울타리 주위로 원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저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몰려든 원주민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임시로 머무는 공간으로 찾아든 손님들. 모여든 아이들. 어릴적 생각이 절로 난다
원주민 포터에게 짐 분배를 하고 이동을 시작한다.
카고가 늦지 않게 잘 따라와 주길 기대한다.
이날 오후 시작한 첫 운행 구간은 바이크 트레일이다.
오토바이 천국답게 덩치 큰 외국인을 한 명씩 태우고도 비포장 언덕을 잘도 달린다.
마치 서커스 같다.
이러다가 원정이고 나발이고 교통사고로 비명횡사 할 것 같아 불안불안하다.
꽤나 먼 거리, 한 시간을 오토바이에 매달려 가는 동안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비까지 내리니 바퀴에서 튀는 모래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오토바이 30여 대가 경주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다가 갑자기 급하게 멈춘다.
그곳 원주민들이 길을 막아선 것이다.
이유인즉, 자기마을 소유 땅을 통과하려면 돈을 내라는 것.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소리를 질러대고 손에 쥔 정글 칼과 활을 휘두르며 윽박지른다.
그보다 더 긴장되는 건 이들이 최근까지도 인육을 먹었다는 부족이라는 사실.
인도네시아 가이드와 원주민 가이드까지 나서서 한참을 실랑이했다.
혹독한 첫날 신고식이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첫 마을인 수강카까지 퍼붓는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임시숙소에서 카고가 오기를 기다린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그칠 줄 모르고 빗속에 칠흑 같은 밤을 맞이한다.
가이드가 말하길, 오늘 중으로 카고가 도착 못할거라 한다.
그러니 저녁식사 또한 각자 해결하라고 한다.
비상식과 막영,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해 난감하다.
해발 2,000m가 넘는 곳은 주야간 온도차가 매우 심하다.
서늘한 바람 옷은 다 젖었다.
이 긴 밤을 비좁은 움막 엉성한 마룻바닥에서 어떻게 지내나?
다리를 뻗지도 못할 지경이다.
깔방석과 배낭을 연결해 바닥을 만들고 새우자세로 웅크리니 간신히 몸을 눕힐 수 있다.
텐트와 따뜻한 침낭이 그립다.
2010년 남극 등반 때 푼타아레나스에서 시간여유가 생겨 파타고니아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 갔다가 눈보라와 맞딱뜨려 간신히 비닐차양 만들어 하룻밤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마룻바닥 아래 강아지가 있나 보다.
그것들도 추워서 그런지 밤새 낑낑대며 돌아다닌다.
자정무렵 쿡이 감자 몇 개를 삶은 솥을 들고 들어온다.
이거라도 먹으니 조금 살것 같다.
또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춥고 습한 기운 때문에 영 잠을 이룰 수 없다.
누군가 걸어놓은 축축한 우비를 염치불구하고 뒤집어쓴다.
결국 새벽에서야 기다리던 카고가 도착해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