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지문 속의 인문학> 플라톤의 아름다운 복수!

feat. 아카데메이아,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by 황 영

y(플라톤의 사상) = f(소크라테스) + (피타고라스) +

(고대철학)


y(플라톤의 삶) = f(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

플라톤의 사상과 삶을 함수로 표현해 봤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라스, 그리고 고대철학을 최초로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가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써 존경하고 사랑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사상을 세세히 대화체로 기록한 광대한 분량의 저서와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의 설립은 사랑하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이끈 아테네 정치를 향한 가장 지식인 다운, 가장 철학자 다운 아름다운 복수였다.





플라톤은 아테네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금수저였다. 19살이 되자, 정치가가 되겠다는 큰 야망을 품고, 당시 정치에 필요한 '말빨'과 '논리'를 키우기 위해 지금의 강남 대치동 학원가, 아테네 '플라카' 지구에서 들을만한 강의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운명처럼 스승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다.


이 친구가 바로 그 백조로군.


지난밤 꿈에 백조가 무릎 위에서 놀다가 기쁜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며 한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처음 봤을 때 환한 이마를 눈부시게 보이며 뱉은 말이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훤칠한 키에, 올림픽 레슬링 2연패를 달성한 전설의 근육질 몸을 가진 자신에게 '백조'라고 말하는 소크라테스를 보며 플라톤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소피스트 강사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강의를 듣다가 한심한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온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탕발림이 플라톤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다. 뻔한 칭찬이지만 싫지는 않았던 플라톤은 속는 셈 치고 소크라테스의 강의를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플라톤은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자리까지 쫓아다니는 오지랖으로 소크라테스와 다른 현자들과의 철학적 배틀을 참관했다. 지속적인 '도장깨기'를 직접 목격하며 스승의 지혜에 탄복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참 스승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정치적 야망도 접은 채 소크라테스의 사생팬이 되기로 결심한다.


사생팬 중에 사생팬, 제자 중에 제자가 되고 싶었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을 마다 하지 않았고, 이는 훗날 그의 '대화편(dialogues)'을 비롯한 주옥같은 책을 저술하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


스승의 지혜는 하늘에 닿았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 또한 하늘에 닿았다. 스승에 대한 경외감은 이내 사랑이 되었고, 이러한 사랑은 오늘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고유명사, '플라토닉 러브(Platonick love)'가 되었다.


윌리엄_데버넌트.jpeg 윌리엄 데버넌트 (William Davenant)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데버넌트(William Davenant)의 책, 희극 <The Platonick Lovers>(1635)이다. 플라톤의 저서, <향연> 내용을 바탕으로 선(善)에 대한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주장했다. 사랑을 육체적인 대상물로 표현하는 것은 저급한 계층에서나 하는 이야기며, 사랑은 품위가 있어야 하며 고매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언급했다.





청춘의 열정과 사랑을 온전히 바쳐, 영원히 행복할 줄로만 알았던 스승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하늘이 시기하듯 참담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배심원들에게 사형을 선고받은 스승에게, 도망가자고, 어디든 함께 하겠다고, 울며 불며 매달렸던 그였다. 당연히 함께 탈출할 것이라 믿었던 스승이 담대하게 독배를 마시겠다고 선언했을 때, 플라톤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누명을 쓴 것도 억울해 죽을 지경인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철학자의 사명이라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심정은 어느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애통함,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고, 온 세포가 하나씩 파괴되어 찢겨 나가는 고통으로 숨이 막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42214_33585_919.jpeg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왼쪽 침대 밑 의자에 앉아 차마 소크라테스를 보지 못한 채, 애통해하는 노인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을 노인으로 나타낸 것은 비유적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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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 1748~1825년): 신고전주의 양식에 속하는 프랑스의 화가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는 18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발전한 미술 사조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문화의 고전적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은 장식, 시각예술, 문학, 연극, 음악, 건축을 이른다.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 직 후,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다시는 아테네로 오지 않겠다며 다짐 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을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했음에 틀림없다. 아테네에 1분 1초라도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승을 이대로 잊어버릴 아테네가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몰랐다. 스승의 억울한 죽음이 오늘날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철학자로 불리는 위대한 '플라톤',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 미국의 철학자


Ralph-Waldo-Emerson.png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아테네를 떠난 플라톤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와 이집트 등을 여행했다. 누군가 12박 13일 동안 슬픔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면 그 기간이 짧지는 않았다고 여긴다. 누군가 12개월 동안 여행을 떠났다면 그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플라톤은 무려 12년간 아테네를 떠나 여행했다.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플라톤은 무엇을 했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플라톤이 여행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처음으로 한 일은 최초의 학교 '아카데메이아(Academy)'의 설립이다.


새벽 어스름을 맞으며 '향연'을 떠날 때처럼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 스승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귀족 청년들에게, 그리고 플라톤 자신에게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상이 되었다. 아테네가, 이 세계가, 절대로 소크라테스를 잊게 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플라톤은 12년을 하루같이 뼛속 깊숙이 반복하며 새겼을 것이다. 스승과 대화를 나누며 지식을 향유했던 행복했던 순간이 매일 밤 꿈에 나타났을 것이다. 즉 철학은 생활 공동체인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라 굳게 확신했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은 시칠리아 여행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를 만나게 된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피타고라스 학파는, 종교적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서로의 철학적 사유를 공유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했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수학을 배웠고, 자연에 관한 지식은 수학을 적용시켜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도 받았다. 플라톤은 훗날 저서 '국가'(The Republic)을 통해 이러한 가르침을 주는 피타고라스에게 존경의 찬사를 보냈다.


Kapitolinischer_Pythagoras_adjusted.jpeg 피타고라스 : 수학자, 철학자



소크라테스적 삶의 형식과 피타고라스적 삶의 형식, 이 두 가지 모델의 융합으로 설립된 '아카데메이아'는 스승의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에 대한 가장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복수의 결과물이었다.



무제.jpeg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장인물 설명
르네상스 시절의 대표적인 천재화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다.





'아카데메이아'는 올바른 정치를 위해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 수학 전문, 전액 무료, 명문 기숙학교였다.


'아카데메이아'는 정치적 의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보고 철학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의 정치가 그토록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된 후, 궁극적으로 정치는 철학자가 해야 한다는 이른바 '철인정치'가 진리임을 주장했다.

철학자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왕이 되지 않는 한,
또 반대로 왕 또는 지배자로 불리는 이들이
실제로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한
국가에 있어서 인류에 있어서
나쁜 것들이 종식될 날이 없을 것이다."

- 플라톤 <국가(The Republic)> 중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추구하는 언변만 능수능란한 정치인을 배출하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새로운 인간을 양성해 낼 책임을 진 지적, 정신적 공동체를 설립하여 교육함으로써. 아카데메이아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정치에 투입되었을 때, 올바른 정치를 펴내는 이상적인 국가를 보고 싶었다.


또한 플라톤은 평등한 자들에게는 평등한 것들이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제자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이에 부응하듯, 아카데메이아의 학생과 그에 걸맞은 혜택을 받은 교수진은 정치 활동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 학문과 정신 수련에 매진하며 청렴한 삶을 살았다.


아카데메이아의 구성원은 두 분류로 나뉘어 있었다. 가르치고 연구하는 활동에 종사하는 연장자 부류(교수진)가 있었고, 젊은 학생 부류가 있었다. 연장자 부류 중에는 플라톤의 제자였다가 훗날 나중에 교사가 된 인물로 무려 20년을 아카데메이아에서 지낸 '아리스토텔레스'도 있었다.


당시, 철학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인물은 플라톤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구성원들의 우수성이나 완벽한 조직 체계 때문에 후대에는 물론 당대에도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카데메이아를 기억하고 모방하려 했던 시도들이 이후의 철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카데메이아가 갖는 역사적인 가치 또한 중요했다.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일반적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알프레드-노스-화이트헤드-3-620x300.jpeg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 : 영국의 철학자, 수학자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에 이르는 수많은 철학적 문제 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 역사 등 인문학 전분야에 걸친 모든 기초는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되거나 비판되면서 무한히 재생산되고 있는 불멸의 원천이다.


플라톤은 철학적 자세와 의지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논리적 체계는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에게서 얻어와 종합하여 완성시킨 최초의 창조적 융합 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