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지문 속의 인문학> 돌부처, 아리스토텔레스

feat. 철학자 중의 철학자

by 황 영


아테네부터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작은 도시에 평민 가정 출신의 한 소년이 살았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의사인 덕택에 부족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삶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부모를 잃은 슬픔과 충격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삶에 대한 깊은 사고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순탄한 성장기를 보내게 되고, 그렇게 18살이 되던 해, 그는 세상과 삶에 대한 궁극적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공부를 더 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그리스 최고의 학교를 찾아 아테네로 떠난다.


당시 최고의 명성과 권위를 가진 학교는 '아카데메이아'였다. 그곳은 그가 꿈에 그리던 학교였다. 그리스 전역에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철학과 수학을 좀 한다 치면 무조건 아카데메이아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녀가 그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아카데메이아의 교장 플라톤 또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다른 학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재수를 해서라도 꼭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또 다졌던 그였다. 드디어 아카데메이아의 입학 면접을 보던 날, 긴장감으로 입술은 바짝 타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보다 43살이나 많았던 교장 '플라톤'의 후광은 그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사로운 것을 물어보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그는 긴장감에 말까지 더듬으며 어눌한 답변을 할 정도로 긴장했다. 온화한 표정으로 인내심 있게 그의 답변을 들어주던 플라톤은 학교의 정문 앞에 붙은 간판을 가리키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기하학과 수학을 모르는 자,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아테네와 한참 떨어진 지방 마케도니아의 시골 촌동네 '스타게이로스' 출신이지만, 그곳에서 나름 똑똑한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수학은 어느 누구와 붙어도 질 자신이 없었던 그였다.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그리고 대도시 아테네가 아닌 촌동네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플라톤은 그의 놀라운 실력에 크게 감탄했고 그를 얕잡아 봤던 자신의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플라톤이 그를 받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합격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그의 이름을 '아카데메이아'의 출석부에 주저 없이 기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마치 조훈현이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일 때처럼,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을 뛰어넘는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 중의 철학자, 모든 학문의 창시자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제자(內弟子) : 함께 숙식하며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의 정신이다.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기원전 384~322 <출처 : 나무 위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 최고의 우등생이었다. 탁월한 천재성에 근면성실함까지 갖춘 아리스토텔레스는 쉬는 시간도 없이, 몸이 상할 정도로 책을 읽으며 학문에 몰두했고, 플라톤의 다양한 가르침을 하나도 빠짐없이 흡수하려는 열의를 보였다. 이런 제자를 싫어할 스승은 세상에 없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각별하게 아끼고 사랑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을 했을 때도, 플라톤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 강의를 시작하지 않을 정도였다. 플라톤은 공공연하게 '아카데메이아'의 후계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목했다. 자타공인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뛰어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서 20년을 지냈다. 그의 나이 40이 될 무렵,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생이 아닌 그곳의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교수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교수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는 교수가 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승 플라톤과 토론을 벌였고, 빈번하게 스승의 의견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것이 반복되자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승의 의견을 반대하는 그의 모습이 결코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졌던 경외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그라들었고, 심하게는 증오와 혐오로 변질되었다.


플라톤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보이지 않는 것, 즉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것에 중점을 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이는 것, 즉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에 중점을 두었다.


플라톤은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idea)'이며, 그 이데아의 그림자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양이가 있다면,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고양이는 가짜이고, 오직 우리의 생각, 이데아 안에서만 존재하는 고양이가 완전한 고양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했다. 다만, 플라톤이 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이데아의 그림자로 치부하며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다 존재하며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고양이가 없다면 이데아라고 불리는 그 고양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방식은 연역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은 귀납적이다.
플라톤은 삼각형의 꼭짓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삼각형의 밑변에서 위를 올라다 보았다.

- 김영건 역 <인식론 : 지식에 관한 철학사적 접근>



플라톤은 하늘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서 진리를 찾는 현실주의자였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왼쪽이 플라톤, 오른쪽이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 구글 이미지>
The Greeks’ focus on the salient object and its attributes led to their failure to understand the fundamental nature of causality. Aristotle explained that a stone falling through the air is due to the stone having the property of “gravity.” But of course a piece of wood tossed into water floats instead of sinking. This phenomenon Aristotle explained as being due to the wood having the property of “levity!” In both cases the focus is exclusively on the object, with no attention paid to the possibility that some force outside the object might be relevant.
[2015년 11월 대학 수학능력 평가 28번]

그리스인은 눈에 띄는 물체와 물건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느라 인과관계의 근본적인 성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이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은 돌이 ‘중력’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물론 물에 던져진 나무 조각은 가라앉는 대신 뜬다. 이 현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무가 ‘가벼움’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물체 밖에 있는 어떤 힘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두 경우 모두 초점은 오로지 그 물체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등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의 본질에 대해 묻고,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어디서 생겨났으며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가르치는 제자가 자신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었음을 느꼈을 때, 그 제자를 보며 오직 기쁨의 감정만을 느끼는 스승은 흔하지 않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제자를 보며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의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 바로 플라톤의 운명이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험담과 모략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매번 거부하고, 만류하는 일은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 플라톤에게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때론 그들과 함께 맞장구치며 자신의 상처 받은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치료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의 후계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목하는 대신, 존재감이 먼지와도 같았던 자신의 사촌을 지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이 스승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고 아카데메이아를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을 만나 함께한 20년 동안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스승을 향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다.



남아 있는 그의 저서 어디에도
플라톤에 대한 과격한 공격은 찾아볼 수 없다.
플라톤을 비판할 때는
항상 정중한 예의가 느껴진다.

-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중에서



선(善)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데,
이것을 잘 생각해 보고 조금이라도 수상쩍다고
생각되는 곳을 샅샅이 들추어내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 학파를
공격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괴로움을 준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 마스 윤리학> 중에서





플라톤이 생을 마감하던 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슬픔을 뒤로하고 아테네를 떠났다. 여러 해를 소아시아에서 보낸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사람과의 만남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난 사람은 바로 열세 살의 소년 '알렉산드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56 ~ 기원전 323 <출처 : 구글 이미지>


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주치의였다. 그 친분 덕택에 그의 손자인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아테네를 정복하고, 세상의 절반을 정복한 대왕 알렉산드로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좋아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하는 곳마다 그곳의 특이한 동식물들을 수렵, 채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위해 보내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명칭을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었고, 아테네와 거의 똑같은 구조의 도시를 건설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 덕분에 그리스 문화에 대한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탓이었다.


인류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권력과 정신이
몇 해 동안 함께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미래의 세계 정복자와 우주적 의미에서
정신적 우주를 정복한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 빌헬름 바이셰덜 <철학의 에스프레소> 중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으로 즉위하고 아테네가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향을 떠나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로 돌아오자마자, 현존하는 최고 지성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이 의미를 가진 '소요학파(die Peripatetike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1996년, 아테네 일리 소스 강둑 근처에서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새로운 미술관을 짓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건물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땅을 파 내려가다 큰 암반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커다란 구조물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건설 작업은 발굴작업으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체육관, 레슬링 경기장, 탈의실, 그리고 욕조의 흔적을 찾았다. 투입된 고고학자들은 그곳이 2500년 전 고대 아테네의 운동 경기와 운동선수들을 위한 곳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소 중에 하나를 발견했음을 깨닫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The archaeologists soon realised that they had found one of the most significant sites in all of western European intellectual culture, a site referred to continually by history’s greatest philosophers: the Lyceum of Aristotle. It was the world’s first university.
[2017년 11월 고2 전국 연합 모의고사 38번]

고고학자들은 서부 유럽의 지식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한 곳, 즉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계속 언급되는 장소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을 발견했음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첫 번째 대학이었다.


'리케이온'의 터 <출처 : 구글 이미지>


기원전 335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이라는 자신의 학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주기보다, 자신이 연구하고 있었던 수많은 분야의 연구를 학생들과 함께 하길 원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직적인 연구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연구를 고르게 하였고, 그 탐구결과를 학생들과 함께 꼼꼼히 저술했다. 훗날 400권, 혹자는 1000권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마 무시한 저서들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도움 덕택이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오늘날 종합대학으로써의 면모를 갖춰나가던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아카데미, '리케이온'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면서, 아테네의 상황은 변했다. 아테네는 더 이상 마케도니아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고, 마케도니아 출신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연히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마땅한 구실이 없었던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한 것과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는 아테네의 정치인들을 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에 대한 허망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 뒤이어
두 번째로 철학자에게 죄를 짓는 일을 막겠다.

이 말을 남기고 아테네를 탈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게 해의 한 섬으로 거처를 옮겨 연구를 계속했으나 바로 1년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플라톤에게 조훈현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창호가 보인다.


<출처 : 경향신문>


1990년 2월 3일 ‘제자’ 이창호, ‘스승’ 조훈현을 처음으로 이기다


처음으로 ‘스승’ 조훈현 9단을 이기던 시절의 이창호 9단. 당시 그는 15살이었다.


'응답하라 1998'에서 '박보검'은 국보급 바둑기사 '최택'을 개성 있게 연기하여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tvN ‘응답하라 1998’의 천재 바둑기사 최택 <출처 : 스포츠동아>


'최택'은 바로 대한민국의 '국수(한 나라의 최고의 바둑 실력자에게 붙여지는 영예로운 칭호) 이창호'가 실제 모델이었다.


국수 '이창호'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기원에 들락거리면서 바둑을 접했던 그는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 나가 장려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당대 최고의 바둑기사였던 국수 '조훈현'의 눈에 띄어 '내제자(內弟子)'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창호는 조훈현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였다.


조훈현 국수 <출처 : 한국기원>


세계 최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이창호는 1986년에 프로에 입단하게 되고, 드디어 1990년 2월 2일, 내제자 6년 차, 당시 15세의 나이에 스승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최연소 최고 타이틀 획득이라는 신화를 쓰게 된다. 스승을 이겨버린 제자는 대국 후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스승을 이겨버린 제자는 대국 후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고마움을 표시했고, 이에 스승은 복잡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환한 웃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 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 조훈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중에서


LG 세계 기왕전 두 국수의 모습 이창호 국수가 3:0으로 이겼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흥미롭다. <출처 : LG 기왕전>


이후 이창호는 조훈현이 가지고 있었던 왕좌를 하나씩 차지하며, 거의 20년 동안 한국 바둑뿐만 아니라 세계 바둑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된다. 자신과 동거 동락하던 어린 제자가 어느덧 자기 자신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스승의 심정은 어땠을까? 조훈현과 이창호는 한국 바둑계의 중흥기를 이끈 가장 위대한 기사 2인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함께 2천 년의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형이상학, 논리학, 정치철학, 윤리학, 자연철학, 과학, 생물학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을 통달하고 학문적 기초를 마련한 서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 중 하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지냈다. 이후 고향을 떠나 외로움과 싸웠고, 때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며 수많은 위험을 겪었다. 그는 강철 멘탈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세상이 그를 힘들게 해도, 절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평온하게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해 나갔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돌부처'와 같은 흔들리지 않은 멘탈의 소유자였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로 인정받는 이창호 국수의 별명도 '돌부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