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여행기에 α를 더하자!
몇 년 전, 나는 전국의 책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책방 탐방'을 주제로 책을 쓰고 있을 때였다. 평소 책방에 들르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은 이상 지방의 작은 서점까지 갈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은 책방의 변화였다. 서울 핫플레이스를 중심으로 작은 책방은 가지가 뻗듯 자라고 있었고, 모든 종류의 책을 쌓아놓는 백화점식이 아니라 '큐레이션', '취향'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책방 주인의 가치에 맞는 책만을 골라서 판매한다던가, 취향(이를테면 고양이 전문 책방, 추리 소설 책방, 음식 문화 책방 등) 위주의 책만 모아놓은 책방이 늘어났다.
책방뿐 아니라 큐레이션이 유행인지는 한참 됐다. 멀리 갈 것 없이 아마존만 봐도 소비자가 관심 있는 상품에 대해 친절하게 비슷한 물건을 추천해준다. 너무 많은 정보 과잉으로 '대신 선택해 주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사업 영역으로 확대된다. 책을 쓰는 입장에서 출판 콘텐츠를 보면, 비슷하다. 집단의 소리보다는 취향을 선택해 개인의 관점에 따라 세밀하게 이야기하는 책을 선호한다. 여행책도 예외는 아니다. 단순히 여행지에서 경험을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이나 개인 취향을 결합한 것이 인기다.
여행책을 기획할 때, 콘셉트를 염두에 두는 것은 우선순위는 아니다. 기본적은 글쓰기 실력을 기르고 책이 될법한 흥미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책을 쓰는 데는 더 유리할 수 있다. 다만, 초보 저자라면 콘셉트가 기발하고 명확할수록 출간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글발로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라면, 콘셉트가 가이드라인 역할을 해 오히려 책 쓰기가 쉬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셉트 잡는 것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다. 여행책은 오로지 여행 경험을 서술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원래 글쓰기에 자신이 있다거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여행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면, 콘셉트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란다.
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는 외국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책으로써 가치가 있었다. 파리의 에펠탑은 거대하고, 센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는 야경의 황홀함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독자에게 환상을 심어줬다. 지금은 인기 있는 유럽 대도시의 풍경은 누구나 '겪고 본 것'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이 도시에 뭐가 있고, 뭐가 있었다'는 나열식은 더 이상 독자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여행책을 읽는 독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길 원한다. 식상한 것을 탈피해야 하는 것이 당장 여행책을 써야 하는 사람의 고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인가? 콘셉트라고 하니 거창한 기획을 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 외로 간단하다. 밋밋한 뼈대에 살짝 살을 붙이고 포장을 해주는 정도도 괜찮다. 같은 파리 여행이라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도시를 보거나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혹은 전혀 다른 분야와 결합하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주제를 뽑아낼 수 있다.
여행책은 사실 덧붙임으로 콘셉트를 잡기에 좋은 유형이다.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넓은 범주에서 보면, 무난하게 성격을 규정하기에 여행 기간만 한 게 없다. 1년 동안 배낭여행을 했다면, '1년'에 초점을 맞춰서 콘셉트를 세우면 된다. 여기에는 여행지에서 겪은 일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흘러나올 수 있다. 1년 여행을 위한 준비, 혹은 1년의 여행으로 인한 에피소드나 1년의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각각의 주제로 뽑아낼 수 있다. 직장인이기 때문에 단기 여행을 자주 한다면, '짧은 여행 기간'을 콘셉트로 잡는다. 그렇다면 '5일 안에 여행할 수 있는 국내외 여행지'라는 주제로 책을 기획해도 좋을 것이다.
여행 방법은 어떤가. '무엇을 타고' 여행할 것인가, 또는 '숙박'을 어디에서 할 것인가, 여행 자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갈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버스, 기차, 자전거 등 교통수단만으로도 주제를 잡을 수 있다. 또는 슬로베니아의 감옥 호텔이나 유럽의 성을 개조한 호텔 등 세계 독특한 숙박 시설을 모아 책을 써볼 수도 있다. 다만 여행 방법에 대한 콘셉트는 애초에 이런 여행법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고, 실행에 옮긴 저자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마을버스를 타고 세계일주를 했다거나, 걷기를 콘셉트로 여행을 주로 하는 저자가 그렇다.
'~와 함께 하는 여행'도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간 제주 한 달 살기 여행이나 부모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도 공감대가 형성되기 좋은 소재다. 부부가 함께 하는 세계 여행은 요즘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지만, 여기에 한 단계 더 들어간 부부의 책이 인상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 행진>은 부부가 결혼식 대신 산티아고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결혼식에 피로감을 느끼는 요즘 젊은 세대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주제여서 당시에도 좋은 호응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콘셉트를 잡을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가장 추천하고 싶은 것은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여행'을 결합하는 것이다.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음악을 자주 듣는다든가 악기를 연주한다든가, 자수 같은 취미 또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뭐든지 괜찮다. 그리고 매번 여행을 할 때, 꼭 그것을 경험해 소재를 미리 수집해두는 것이 좋다. 그걸 모아서 글을 쓰면 나만의 개성이 담긴 독특한 주제의 여행책을 만들 수 있다. <민희, 치즈에 빠져 유럽을 누비다>의 이민희 작가는 5개월 동안 프랑스와 스위스를 자동차로 누며 치즈 문화를 접하고 그 경험을 담은 책을 냈다.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 유럽 여행을 할 때, 스위스의 까망베르 치즈를 맛보고 유럽의 치즈에 단숨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직장 생활을 하며 4년간 유럽 치즈 여행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2007년도에 발간된 꽤 오래된 책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유형의 여행기는 흔치 않았다. 단순히 치즈에 대해 서술한 책은 있지만, 그것이 여행기와 만나면서 특별해졌다. 치즈를 통해 유럽의 문화를 표현하고, 치즈를 매개로 지역 사람들과 만난다. 여행 이야기는 한결 더 풍성해지며, 책의 중심이 잡힌다.
요즘은 이런 유형의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식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좋아하는 것'의 분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필름 속을 걷다>도 좋은 예시다. 영화 <비포선셋>의 배경인 파리, <글루미 선데이>의 부다페스트 등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도시를 여행하며 쓴 에세이로, 영화팬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과 여행을 접목시켜도 좋다. 이희인 작가의 <여행자의 독서>는 여행과 독서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세계의 여러 여행지와 그 여행지에 어울리는 책을 심도 있게 소개한다. 스페인에서는 <카탈로니아 찬가>를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 다룬다. 이 외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많다. 공연 관람이 취미인 사람은 유럽 공연 여행을 소개하는 책을 쓸 수 있을 것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을 하며 전 세계의 술 시음기를 쓸 수도 있다. 단, 한 가지 까다로운 점이 있다면 여행 전 꼼꼼한 기획이 필수라는 것이다. 여행지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곳을 취재할 것인지 철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취재를 위한 여행이 되기 때문에 마냥 여행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단점은 있다.
좋아하는 일뿐만 아니라, 본인이 어떤 특수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거나 한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여행과 접목시켜도 된다. 건축가들이 쓴 유럽 건축 여행기라던가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쓴 클래식 여행기 같은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꼭 전문 직종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본인이 해당 분야에 상당한 지식이 있거나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봐도 좋다. 유럽의 미술관에 흥미가 있다면 그 분야를 적극적으로 공부한 후 여행기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도 좋은 예시다.
여기까지 읽은 분이라면, 책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독자를 겨냥하고 고려해서 기획해야 함을 느끼셨을 것 같다. 그렇기에 책을 쓸 계획이 있다면 콘셉트는 반드시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본인 혼자만 보는 글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책은 저자를 비롯해 출판사와 독자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내가 콘셉트를 잡아야 할지 감이 안 온다면, 마음에 있는 생각을 자꾸 글로 꺼내놓기를 권한다. 앞서 언급했던 책방 탐방 책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 매일 쓰기' 폴더에서 발견한 아이템이다. 그동안의 여행기를 추억하며 계속 써내려 가다 보면, 구슬 꿰듯 하나로 연결되는 주제를 발견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