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편을 써야 한다. 일단 워드를 열어놓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잠깐 고민한다. 랩의 훅처럼 임팩트 있는 문장을 쓰고 싶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떠올린다. 내 글이 소설은 아니지만 욕심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깜박이는 커서에 단어 몇 개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한 두 문장을 겨우 적어 내려간다. 갑자기 목이 탄다. 잠깐 주방에 들러 물 한잔을 마시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생각나지 않는 단어가 있어 인터넷을 켜보니 보고 싶었던 영화가 검색어에 올라있다. 영화 예매를 먼저 해두고.. 다시 글에 집중하자. 아뿔싸. 채워야 할 여백이 까마득해 보인다. 아직 마감이 좀 남았으니 내일쯤 다시 써볼까. 내 글쓰기 패턴은 부끄럽지만 이렇다. 쓰기보다는 피하기가 먼저다.
나는 항상 글을 써왔다. 회사에서 내 일은 대부분 글을 쓰는 것이었다. 보도자료와 사보 기사를 작성하고, 뉴스레터에 실을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고, 카탈로그에 들어갈 카피를 어떻게 하면 잘 뽑을지 고민했다. 글의 양만으로 치면 꽤 많았다. 하루에 기사 두세 편을 작성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땐 글쓰기가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빈 종이에 글자를 채워야 하는 의무감보다 두려운 것은 내 경험, 감정, 생각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행기는 자신이 잘 드러나는 글 유형 중 하나다. 여행지에서 본 것, 그에 대한 생각, 무엇을 했는지를 그대로 적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글쓰기가 쉬운 사람도 있는 반면 나처럼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행 중 시간을 착각해서 기차를 놓칠 뻔했다던가, 영어를 잘못 알아들어 손해를 봤다던가,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길을 헤매야 했던 바보 같은 경험들은 내 글에서 삭제하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드러내는 것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꾸 써보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내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물론 쓰기 자체의 즐거움도 있다. 가끔씩 글이 기가 막히게 잘 써지는 날이 있다. 문장은 재치 있고 문단의 흐름은 자연스럽다. 매일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로 빠른 시간에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게 잘 써지는 날은 흐름을 잘 탄 날이다. 파도를 잘 만나 보드가 매끄럽게 올라가고 그 위에서 춤을 추며 최상의 서핑을 하듯이. 그 흐름을 만나기 위해서 내 경우 꽤 긴 시간의 '예열'이 필요하다. 글쓰기와 직면하기 싫은 순간을 이겨내는 시간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글을 쓰기 전 이 예열의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그는 3시간 동안 뉴스를 보거나 이메일을 읽는 등 최대한 미루다가 글을 쓰는데, 미뤘던 시간이 그에게는 글쓰기의 원동력이다. 그는 3시간 동안이나 글을 쓰지 않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에 몰두한다. 세계의 거장도 이런 식으로 글쓰기와 마주 보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우리는 지극히 정상이다.
글을 쉽게 쓰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행위는 습관화시키는 것이다. '좋은 행위는 무조건 습관화하라'는 성공 비법공식이 자기계발서에 무수히 명시되어 있지만 글쓰기도 그 영역에 있다. 오래전 읽은 책에서는 한 작가가 글쓰기 습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다뤘다.
1)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한 시간씩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책상에는 글을 쓰기 위한 도구 외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2) 그 시간에는 오로지 글쓰기에만 집중한다. 인터넷, 문자는 물론 독서 같은 행위(글쓰기와 관련 있어 보이지만 다른 행동)도 절대 금지다.
3) 글이 잘 써지면 좋지만, 글이 안 써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한 단어만 쓰더라도 백지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은 오로지 글쓰기에만 투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괴로울 것이다. 글은 쓰기 싫고, 몸은 베베 꼬이고,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익스플로러 창 너머로 수많은 오락거리들을 즐길 수 있다. 하다못해 오늘 날씨를 당장 확인해야 할 것 같은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을 참아낸 후 한 달이 지나고, 또는 일 년이 지나면 그 시간이 되면 글을 쓰지 않고 견딜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결국 중력에서 벗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즐겁게 쓰기를 목표로 하는 것보다 쓰기 싫은 행위를 조금씩 덜어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 한편을 쓰지 않아도 좋다. 오늘 다섯 줄을 썼다면, 내일은 여섯 줄을, 다음 날은 일곱 줄을 채워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글의 논리와 구성을 세우는 것보다 일단은 양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에 집착하다가는 도중에 그만둬버릴 확률이 높지만 글의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질적으로 좋아진다. 위 예시처럼 하루에 한 시간을 글쓰기에 투자할 여유가 없다면, 내일 당장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부터 써보는 건 어떨까.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답은 오로지 '일단 먼저 쓰고 봅시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