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글감을 모으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는 있지만, 나를 글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작가라는 호칭도 낯간지러울 때가 많다. 보석 같은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치열하게 사투하는 작가의 노력과 타고난 재능만이 가질 수 있는 타이틀을 공으로 얻은 것 같은 민망함이 있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합니까? 해도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들에 대한 동경은 어릴 적부터 책과 함께한 내 삶과 결을 함께 해 온 것이니까. 내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굳이 따져보자면 전달자 정도가 맞지 않을까 싶다. 여행지의 정보를 알리거나 느낀 감정을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뭐 그런 정도.
어찌 됐건 그들에 대한 동경은 작가들의 여행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는 때가 있다. 그래서 전문 작가들이 출간하는 여행기는 대부분 읽어보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반은 실망하고, 반은 감탄한다. 너무나도 문학적인 글은 편하게 흘러가야 하는 여행기에 피로감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읽다 보면 여행지를 묘사한 글을 읽는 건지 멋들어진 문장을 읽기 위해 책을 쥐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수준까지 오게 된다. 물론 멋진 글이 여행기에 감흥을 더해주는 경우도 많다. 그런 책이 여럿 있지만 그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을 가장 좋아한다.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굳이 이유를 덧붙이지 않겠다. 한 가지, 그의 담백한 여행기를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글을 쓰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여행기를 많이 쓰는 작가가 있을까 싶다. 몇 년 전 한 책에서는 자신의 여행기 쓰는 방법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중 기록에 관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여행지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요 키워드를 기록하고, 세밀한 묘사는 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그 순간에 몰입해서 내 안에 충분히 담아오려고 한다.' 정도였던 것 같다. 기록 외에 특별한 비법이 없다는 것이 반가웠고, 무라카미 하루키 정도 되는 작가도 글감을 가져오기 위해 여러모로 고민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 이름이 새겨진 여행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묻고 싶다. 지름길로 가는 방법을 일러준다면, 일단 여행지에서 뭐라도 쓰라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은 해봤을 것이다. 비록 '여행책 출간'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은 없더라도, 여행의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여행 경험을 기록하기로 마음먹는다. 하루, 이틀 정도는 노트에 빽빽하게 글을 채운다. 삼일째부터가 문제다. 몸은 천근만근이다. 우선 침대에 누워 내일의 알찬 여행을 위해 휴식을 취하느냐, 먼 미래에 추억을 되새기기 위한 기록을 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결국 글쓰기 싫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많은 여행을 해오면서 늘 반복해왔던 패턴이다. 쓸모없는 여행 기념품만을 모아놓은 오래된 박스 안에는 새것과 다름없는 노트가 먼지와 함께 전리품처럼 가득 쌓여있다. 처음 기록을 제대로 해본 것은 두 달간 유럽 여행을 했을 때였다. 모처럼의 장기 여행이었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기'는 내가 세운 목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두 권의 노트를 가득 채웠다. 쓸 공간이 부족해 노트 표지에도 메모를 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 기록은 내 첫 책을 쓰는데 가장 귀중한 재료가 됐음은 물론이다.
이제부터라도 여행 중 많은 글감을 담아오리라 다짐했더라도 '무엇을 적어야 하는가?' 글쓰기에 익숙지 않는 사람은 고민은 이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을 적어라'라고 말하고 싶다. 보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편하게 일기 쓰듯 시작하면 된다. 나도 그랬다. 뭘 써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모두 적었다. 할슈타트는 비가 올 때 어떤 풍경인지에 대해서, 뜬금없이 수다를 떨다 사라진 낯선 자다르 주민과의 일화라던가, 빈의 카페에서 냉랭한 웨이터와의 기싸움, 그때 먹었던 달콤한 디저트의 맛, 기차 안에서 본 초승달의 모습, 심지어 전날 밤 꾼 꿈까지도. 이런 세세하게 기록하는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공을 들여야 하지만, 대신 책에 쓸 소재는 풍성해진다. 필력이 좋지 않은 내게 적합한 방법이었다.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핵심 문장들만 적어오는 편이다. 그동안 기록을 콘텐츠화하는 과정을 몇 번 겪고 나니 어떤 정보가 쓸모 있는 것인지 판별하는 방식이 나름 생긴 것이다. 그래서 글감으로 쓸모없겠다 싶은 것은 소재는 미리 필터링한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궁전의 벽화에 대한 감상을 한 페이지에 걸쳐 늘어놓았다면 지금은 핵심 단어를 포함해 한 두줄로 간단히 요약해서 메모한다. 적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편해졌는데, 마냥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행에 대한 감흥이 그만큼 떨어져서 쓸 말이 줄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있다. 그래도 이게 내게 맞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돌아와 글을 쓸 때 느낀다. 기록이 명료해지니 오히려 주제를 찾기 쉬워졌다. 이렇게 본인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서는 물론 꾸준히 써보면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처음 여행 글을 쓰는 분들에게 특정한 '여행 기록 가이드'는 다소 부담이 될 수 있으니, 현장에서 본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하고 싶다. 내 감정과 생각이 신선할 때 순간 잡아채는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그 외에 반드시 적어와야 할 것들도 있다. 객관적인 정보들, 이를테면 주요 관광지의 입장료나 오픈 시간, 레스토랑의 이름과 메뉴, 열차 시간, 그 지역에서만 쓰는 고유 명사 등등. 물론 요즘은 구글링으로 얼마든지 정보를 검색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현지에서 취하는 정보가 제일 정확하다. 이런 정보는 내 책에 여행지 정보를 수록해야 할 경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록에 대한 이야기에서 장소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좋은 여행지에서 기록법은 생각날 때마다 적는 것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트레비 분수 앞에서 젤라토를 먹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게 귀찮은 일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짬짬이 쓰는 게 가장 좋다. 새롭게 떠오른 생각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짧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지나가는 시간이 많음을 느낄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릴 때, 버스를 기다릴 때, 관광지에서 휴식을 취할 때 등등. 그럴 때마다 노트를 꺼내서 적어라. 일석이조다. 시간도 때우고, 기록도 하고.
여기저기서 글을 써본 결과 나와 궁합이 맞는 장소가 기차 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상당히 모순적인 장소다. 혼자이기도 하면서, 혼자가 아닌 곳. 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만 움직이고 있는 곳. 이상하게도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글을 쓸 때면 막힘없이 술술 글이 흘러간다. 그래서 이 시간을 잠이나 수다로 흘려보내지 않고, 미뤄뒀던 글을 쓰는데 항상 시간을 할애한다. 머물고 있는 숙소 분위기도 간혹 영향을 준다. 시라쿠사에서 오래된 허름한 호텔에 머문 적이 있다. 일정이 남아서 급하게 예약한 곳이었는데, 퉁명스러운 호텔 주인은 그렇다 치고 복도의 걸음걸이가 들릴 정도로 방음이 형편없는 곳이었다. 방은 음침했다. 오래된 듯한 커다란 침대와 낡은 거울이 달린 서랍장 하나만으로도 꽉 찰만큼 비좁았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집필했다는 이스탄불 페라 팔라스 호텔 방과도 비슷했다. 하필 그 날은 비가 내렸고, 오전 내내 방안에 머물러야 했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칙칙하고 어둑한 방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밀렸던 글을 썼다. 그때 쓴 글을 보면 우울함의 극치다. 나는 여행을 왜 왔을까. 에서부터 시작해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 '호텔에서 일어날 법한 우연'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문다면 좋아하는 한 장소를 지정해 아지트를 만드는 것도 좋다. 이를테면 '중세 시대를 그대로 재현한 궁전 카페'는 어떤가. 부다페스트에서 내가 발견한 보물 같은 장소다. 황금빛 매일 연주자가 라이브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아래층에는 대형 서점이 있었다. 갓 뽑아낸 커피 한 잔만 있으면 뭐든지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글을 쓰는 도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사소한 것이지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다. 하드커버가 있는 손바닥만 한 수첩은 내가 애용하는 노트다. 같은 노트가 10개가 색색별로 상자에 쌓여있다. 펜은 물 흐르듯이 슥슥 써지는 가벼운 것이어야 한다. 사실 별거 없다. 여행할 때 필기도구는 이걸로 해결한다. 다만 이런 경험이 있다. 여행 중 '완벽한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던 순간이 있었다. 수기로 메모는 가능하지만 완벽한 글을 쓰는 데는 여러모로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패드에 맞는 전용 키보드와 전용 펜슬도 마련했다. 매일 완성된 글 한편씩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느지막한 오후,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우아하게 글을 쓰는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계획은 며칠도 채 안 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밖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글을 쓸 수가 없었는데, 딱히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럴 마음이 안 들었다. 의외로 손으로 쓰는 것보다 진도는 터무니없이 느렸다. 밤늦게 숙소에서 밀렸던 글을 몰아 쓰는 것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노트와 펜을 구입해 원래의 방식대로 짬짬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지에서 기록은 갓 잡아 올려 팔닥팔닥 뛰는 생선처럼 싱싱한 글감을 말 그대로 건져오는 작업이다. 재료가 있어야 요리를 할 것 아닌가. 여행기는 그 재료를 튀겨도 보고, 토막 내어 구워도 보고, 양념을 얹기도 해보면서 맛있게 요리하는 과정이다. 기록을 묵은지처럼 푹 익힌 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한 두 달 후 그 기록을 보면, 여행 중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흐름을 발견하면서 이색적인 글의 주제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기록으로 인해 여행에 부담을 느끼면 안 되겠지만, 아니. 부담 좀 느끼면 어떤가. 그게 여행 작가의 일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