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에 독자와의 접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보다 편집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편집의 힘이 잘 드러나는 유형은 방송이 아닐까 싶다. 예능 프로그램은 10시간 남짓 녹화한 것 중 액기스만 뽑아 한두 시간 분량의 방송을 만들어낸다. 편집의 영향이 강한만큼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격과 재미가 결정된다. 무한도전이 국민 프로그램으로 사랑받았던 것도 센스 있는 편집 덕이 컸다. 방송뿐 아니라 모든 매체는 편집의 영역에 있다. 신문에서 주요 이슈를 기사로 걸러내고, 하나의 글에서 주요한 메시지를 뽑아 헤드라인을 만들 듯, 편집은 내 주장을 세밀하게 강조하는 작업이다. 여행 사진을 블로그에 올릴 때, 전경을 담은 사진 그대로를 내놓을 수도 있지만, 특정 공간을 잘라서 올리기도 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글도 말할 것 없이 편집의 영역에 속해있다. E. M. 포스터는 <모리스>를 쓰면서 소설 후반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남자를 등장시킬 때, 세심하게 처리했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암시가 주어지면 독자가 지루할 것이고, 반대로 암시가 너무 조금 주어지면 독자는 어리둥절 할 것'이기에 인물이 천천히 드러나도록 장치를 만들었다. 독자에게 남자의 등장을 강렬하게 남기기 위해 강약을 조절하는 편집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여행기는 어떨까? 여행기는 다른 유형의 글에 비해 본인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철저히 여행지에서 내가 겪은 일, 내가 느낀 감정, 나의 관점을 바탕으로 글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쓰기 초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도전하기 쉬운 글이기도 한 반면, 그만큼 자기 함정에 빠지기 쉽다. 여행에서 겪은 모든 일을 '나만 경험했던 특별한 사건'으로 보고 글에 줄줄이 나열하는 일이 흔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언급했던 '편집', 즉 내 글의 핵심을 돋보이게 하고 독자와의 접점을 마련하기 위한 '가지치기'의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거친 글이 되기 쉽다. 이럴 경우 글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
첫째, 글의 주제가 선명하지 않다.
프라하를 여행했던 경험을 글로 쓴다고 생각해보자. 작지만 볼만한 것이 많은 도시다. 구시가지의 여러 상점을 구경하거나, 카를교를 건너고, 프라하성에 오른다. 야경을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이 모든 경험을 한편의 글에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여행기를 쓸 때 가장 단순하면서 촌스러운 구조는 시간순으로 내가 했던 모든 일을 나열하는 것이다. 글에 힘이 없어지고, 흔하고 뻔한 이야기에서 그치고 만다.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특별한 글감이 아닌 때에는 더 그렇다. 여기에서 글쓴이가 해야 할 일은 적절한 편집이다. 내가 겪었던 일 중 인상 깊은 일 한 가지만 선정해 적으면 된다. 프라하 여행기 중 '카를교를 여러 번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책에 넣었던 글 중 하나다. '프라하에서 본 마리오네트 인형'이라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글 한편은 나올 수 있다. 내 경험은 모두 귀중하지만, 그건 오로지 나에게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책을 쓰고자 하는 이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여백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나 역시 처음에는 '내 경험은 모두 소중하니 버릴 수 없다'는 쪽이었다. 이런 글쓰기는 '자기만족'에서 시작한다. 여행지에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빠짐없이 빽빽하고 쓰고 나면, 남는 건 묵은 과업을 달성했다는 본인의 뿌듯함 뿐이다. 읽는 이들은 어떨까? 서사 없는 여정을 따라가느라 숨이 차고, 지겹다. 반쯤 읽다 책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내 앞에서 여행 이야기를 한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재미있는 경험이더라도 금세 지겨워질 것이다. 시중의 여행 에세이를 읽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글이 있다. 공통점은 글에 여백이 있다는 것이다. 핵심만 언급해서 독자가 쉬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때로는 여백이 울림이 더 크다. 조금 아깝더라도 글에 빼기가 필요한 이유다.
셋째, 자기감정에 빠져 갈피를 잡기 어려워진다.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딴 길로 새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글의 흐름을 이해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의도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예전에 한 여행 에세이를 구입한 적이 있다. 제목도 구성도 좋았고, 처음 접하는 도시를 다룬 글이라 흥미로웠다. 저자의 글도 절대 초보라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단, 읽는 내내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글의 수준과 상관없이 글의 대부분이 배경 설명 없이 자기감정의 흐름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공감대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글솜씨가 훌륭해도 독자들을 위한 접점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는 힘들다.
결국 여행기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경우는 글의 중심이 독자가 아닌 '본인'에 맞춰져 있을 때다. 내 관점이나 주관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독자들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하거나 과도하게 많은 것을 넣으려고 하는 경우라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글 한편 뿐 아니라, 책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어떤 여행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책 한 권에 에세이와 여행지에 대한 정보, 문화, 역사, 가이드와 이것저것을 전부 넣으려고 할 경우, 가이드북이 아닌 이상 정체성이 모호한 책이 되기 쉽다. 물론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인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과도하게 본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쓴 책은 독자들이 먼저 알아채고 외면한다. 책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본인의 만족도 있겠지만 결국 독자들과의 소통이 우선이다. 여기서 자기만족이라는 것도 결국 내 지식을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고 공유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나를 위한 글'은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출간을 생각한다면 내 욕심은 조금 덜어내고 '독자'쪽으로 주파수를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세 가지 방법>은 쓰는 이의 욕심을 버린 대표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이 분명하니 책 자체가 담백하다. 스페인 여행책을 쓴다면 일반적으로 도시별 여행정보나 에피소드를 나열하는데 집중한다. 이 책에서는 도시에 대한 설명은 없다. 스페인 같은 유명한 여행지는 인터넷만 검색하더라도 나오는 정보가 수두룩하기 때문에 '어디'가 아닌 '어떻게'에 집중한다. '어떻게'는 세 가지의 테마로 분류한다. 다국적 버스여행과 같은 여럿이 함께 하는 여행, 에어비엔비 등 사교적으로 하는 여행. 그리고 공정여행으로 나누고 섹션별로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방식이다. 세 가지가 다른 주제지만 결국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다. 소셜, 여행을 통한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로 꿰어진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독자를 위한 글과 내 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 것일까?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책의 주제나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봐야 할 부분도 있다. 한 가지 약간의 힌트가 될만한 사실은 독자를 특정해 놓으면, 그 접점을 찾기가 조금은 쉬워진다. 독자 범위를 좁혀 놓으면 독자가 원하는 것을 주기가 한결 용이해진다. 특정한 가상 인물을 만들어도 좋다. <1년에 한 번씩 여름휴가에 해외여행을 열흘 이상 떠나고, 서정적인 에세이를 자주 읽는 20대 직장인 김 모 양> 이 인물에게 맞는 책을 쓰면 되는 것이다. 요즘은 여행책에도 특정 대상을 겨냥한 책들이 종종 나온다. 배낭여행족을 위한 다양한 정보들이 담긴 책, 아이들과 함께 한 여행기,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여행 등등……
독자를 위한 글이 중요하다고 장황하게 풀어놨지만, 실제 적용해보려면 어렵다. 나도 매번 어려움을 느낀다. 과연 내가 쓰는 글의 방향이 내 욕심 때문에 흐트러진 건 아닌지 의문을 가지고는 한다. 처음 책 쓰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우선 아무 글이나 쓰라'라고 말하지만 그 단계가 지난 후, 그러니까 일정기간 쓴 글이 무르익고 주제와 목차를 본격적으로 정할 때쯤이면 객관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즘 여행기는 어떤 식으로 쓰고 구성하는지를 분석해보는 것도 좋고, 지인이나 주변인의 객관적인 의견을 받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