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의 유형에 대하여
한 기자가 영화 프로모션 현장에서 두 명의 영화배우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영화 완성본을 보고 본인 연기에 대한 평가나 분석을 하나요? 두 배우의 답변이 달랐다. 한 명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단 한 번만 본 후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수십 번 보면서 연기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낸다고 했다. 정답은 없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다른 것뿐이다. 책과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저자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2쇄를 찍지 않는 이상 나온 책은 다시 들춰보지 않는 편이다. 잘한 것 하나보다는 잘못된 수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책을 쓸 때 보지 못했던 문장의 오류와 잘못된 표현법 등 고쳐 쓰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미 결과물은 나와 있는 상태에서 창피함만 더해질 뿐이라서 결국 덮어두고 만다. 거기에 얽매이게 되면, 다른 글을 쓰기가 힘들어진다. 전에 쓴 글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새로운 글을 쓸 때 반영하는 것이 글 쓰는 이의 모범적인 자세겠지만, 나는 그만큼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못하다.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몇 년 전에 쓴 여행기 초고를 발견했다. 차마 여기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지만 지금은 발견할 수 없는 참신함이 있다. 몇 년간 여행기를 써오면서 내 글의 스타일이 많이 변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뀐 여행 방식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유명 관광지는 꼭 봐야 직성이 풀었고, 엑셀에 빼곡하게 하루 일정을 채워서 바쁘게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렸었다. 그때 썼던 글은 여행과 닮아있다. 빽빽하고 숨이 차다. 한 곳에 조용히 오래 머무는 여행을 하게 된 지금 글도 한결 여유로워지고, 풍경과 사물을 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확실히 이전보다 나아졌다. 몇 년간 여행기를 써오면서 되도록이면 다양한 유형의 여행기를 쓰려고 노력했다. 자기부정이 때로는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쓴 여행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꾸준히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초반에는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몰랐다. 자신 있는 글이라곤 '~했다고 밝혔다.'로 끝나는 보도자료나 '~씨는 이러저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와 같은 인터뷰 기사뿐일 때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여행을 하는 모든 순간에 대해 썼다. 이를테면 불가리아 벨리코 투르노보를 여행할 무렵 그 도시의 밤 풍경은 어땠는지, 아침 일어나자마자 수도관이 터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매일 방으로 배달된 식사의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길거리에서 내게 말을 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이었는지 등등. 구구절절 글 한편에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것을 적었다. 그러다 보니 글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 글이 길어지고 늘어졌다. 여행기에 정해진 글의 분량은 없다지만 내가 체감하기에 한 주제당 최대 세 페이지 이상이 되면 글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 글의 주제, 포인트가 없어졌다. 일정 위주로 쓰는 여행기의 문제점은 글이 지나치게 병렬식, 나열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결국 일기와 다를 바가 없는 글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장 큰 문제점은 글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쓰는 나도 재미가 없는데 읽는 사람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유머든 감성적이든 글이 쓰는 내 마음에 와 닿는 지점이 없다면 글쓰기를 금방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재미있는 글을 써보는 걸 다음 목표로 삼았다. 여행기가 재미있으려면 이야기가 드라마틱해야 했다. 그래서 여행기의 중심을 '여행지에서 일어났던 다이내믹한 사건'으로 잡았다. 우연히 만난 일본인과 함께 루마니아를 여행했던 이야기, 할슈타트에서 비가 오는 바람에 여행을 망쳤던 이야기, 나 혼자 머물렀던 비앤비에서 집단 싸움이 벌어져 공포를 느꼈던 에피소드 등. 여기에서 신경 썼던 것은 여행지에 대한 설명은 최대한 간략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갔던 여행지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글의 무게중심은 하나에만 둬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건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니 글이 전보다 명확해졌다. 사건 중심이라 더 생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편씩 쓰다 보니 내게 맞지 않은 방식이라고 느꼈다. 내 여행 자체가 정적인 탓에 좌충우돌 여행기를 쓰기엔 글감이 충분치 않기도 했고, 극적인 무언가를 보여줘야만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억지로 밝고 통통 튀게끔 오버스럽게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도 느꼈다. 안 맞는 옷을 입은 양 글쓰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해서 다른 형태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의 글쓰기 방식에서 얻은 것은 하나의 사건이든, 장소든 주제를 세밀하게 잡을수록 글이 선명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글의 주제를 잡을 때, 세밀하게 쪼개려고 노력했다. 하루에 있었던 사건, 또는 한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 10~20가지가 있다면 그중 가장 강렬했던 한 두 가지만 선택해 글의 주제로 정했다. 빈은 쓸만한 글 소재가 많은 곳이었다. 그중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에곤 실레에 대한 이야기를 골랐다.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보게 된 후의 감상과 그의 삶에 대해 적었다. 글 아래에는' 누구든 빈에 가면 마음에 남는 예술가를 한 명쯤 품고 오게 된다'는 부제를 붙였다. 가장 인상적인 일을 위주로 적다 보니, 글쓰기도 쉬웠고 글의 인상도 보다 강렬해졌다.
글쓰기가 한결 가벼워졌지만, 아직도 글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비는 곳이 보였다. 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물론 뛰어난 문필력으로 글 한편을 꽉 채우는 게 이상적이지만,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가능한 부분에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 다른 글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행기가 심오한 글도 아니고, 물 흐르듯 여행 경험을 서술하고, 허점이 보이는 게 외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 글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이런 기법을 추천한다. 여행기만큼 문학적 요소를 인용하기에 좋은 유형이 있나 싶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샤프베르크 산에 가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게 당연하다. 파리의 유명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다녀왔다면 이 서점을 사랑했던 헤밍웨이의 삶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 질 것이다. 피렌체 여행기를 쓸 때면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나 소설 <전망 좋은 방>을 인용해 묘사하면 더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
체코의 쿠트나호라에 있는 해골성당에 갔을 때, 나는 <에브리맨>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생각났다. 무덤에서 뼈를 보며 위안을 받는 장면이었다. '육신은 녹아 없어지지만 뼈는 지속된다. 내세를 믿지 않고 신은 허구이며 지금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삶이라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 뼈는 유일한 위로였다.'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다. 보는 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만족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좋아하는 글의 유형은 한 장소에서 하나의 장면, 사물을 정해 더 깊이 있게 쓰는 것이다. 시칠리아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다면 그 음식을 먹었던 식당, 음식에 대한 묘사 더 나아가서 음식 문화나 그 음식으로 인해 일어났던 에피소드까지 줄줄이 쓴다. 여태까지 써왔던 모든 것이 저절로 복합적으로 적용된다. 재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여행기 중 가장 의미 있게 표현하는 유형이고, 무엇보다 내 성향에 맞는다.
글을 쓰면서 느끼지만, 글을 가장 오래 쓸 수 있는 법은 본인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행책의 가장 큰 분류인 가이드북, 에세이도 성향에 따라 갈릴 것이다. 꼼꼼하고 여행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객관적인 글을 쓰는 것이 적성에 맞는 사람은 가이드북을,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글을 쓰는 것을 즐겨하고 그런 글이 독자들의 마음에 닿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에세이를 집필하는 것이 더 맞다. 여기에는 글쓰기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써봐야 자신에게 맞는 글의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래 목록은 여행기를 쓸 때 적용해보면 좋을법한 글의 유형이다. 참고하여 글쓰기 훈련을 시작해보길 바란다.
- 시간의 흐름대로 사건을 나열하기
- 인상적인 사건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에 대해서만 쓰기(에피소드, 사물)
- 여행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서정적인 형태의 글쓰기
- 여행에서 일어난 사건과 일상의 접점을 찾아 비교하는 글쓰기
- 역사나 문화에 대한 탐구로 시작해 인문학적 시각에서 글 써보기
- 여행지에서 본 것을 객관적으로 써보기(기사글, 가이드북 글)
- 여행지 외의 경험에 대해 써보기(공항에서 일어난 일, 여행 준비에 대한 글, ~하는 방법에 대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