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책 출간 가이드
서점 매대에 올라와 있는 내 책을 보면 감격스럽기보다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첫 책을 냈을 때도 그랬다. 수많은 여행 에세이 중 하나일 뿐이라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을 실감한 순간은 누군가가 내 책을 읽은 흔적을 발견했을 때다. 인터넷 서점의 짤막한 댓글이나, 아무개 씨의 블로그에 '이 책은 이러저러해서 읽을만했다'는 (흔치 않은) 후기가 올라왔을 때 '읽혀서 살아있는 책'이 되었다고 실감했다.
이쯤 되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차르륵 머릿속에 흘러가기도 한다. 여행 도중에 노트를 잃어버려서 숙소까지 되돌아가야 했던 일,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한 줄도 못쓰는 일이 허다했던 나날들, 일이 틀어져 원고를 다시 써야 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모든 과정을 곱씹다 보면 책은 내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 중 영감을 줬던 사람들(노트를 직접 가져다줬던 친절한 숙소 주인을 포함하여), 흔쾌히 취재에 응해줬던 인터뷰이들, 더 나은 책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편집자 및 출판사 관계자들. 그분들의 수고가 더해져 한 권이 책이 되었다.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서가 위 책을 보고 담담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편에서는 여행책 한 권이 출간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다루려 한다. 여행책을 내고 싶지만, 어떤 순서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분을 많이 봐왔다. 책 쓰기가 혼자만의 작업이라 생각해 두려움을 느끼는 분도 적지 않았다. 그런 분들을 위한 가이드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이 가이드를 통해 '여행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과 책이란 것이 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비교적 안심하고 시작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행책의 경우 저자가 가진 자원에 따라 출간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취재 여행으로 시작할 것이냐', 또는 '여태껏 해왔던 여행 경험을 취합하여 책을 써볼 것이냐' 등 목적에 따라서 방식을 완전히 달리 진행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책을 출간하기까지의 줄기는 대략 비슷하다. 여러 방식 중 내가 겪어왔던 방법을 기반으로 책 쓰기 순서를 적어보았다.
/여행 책 쓰기 전체적인 순서를 다루는 편이라 전에 썼던 글과 중복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약본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1. 여행 중 글감 수집하기
여행책을 쓰려면 당연히 글감, 즉 여행 경험이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후 떠나는 여행이든, 무작정 가서 부딪히는 여행이든 중요한 것은 내 여행 콘텐츠를 듬뿍 담아오는 일이다. 이전 글에서도 여행 중 기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가 여행을 하며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모든 것이 여행기의 글감이 될 수 있다. 특히 글쓰기에 미숙한 사람일수록 현장에서 가져오는 글이 많아야 한다. 여행책은 글을 잘 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기에 건져온 글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여행기를 쓸 확률이 높다. 하루에 한 번 꼼꼼하게 그날 있었던 일을 노트에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이나 녹음 등 본인이 원하는 방법으로 기록해도 좋다. 잘츠부르크에서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녹음한 적이 있다. 마치 작은 음악회에 홀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녹음된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글을 썼다.
글감은 본인이 겪었던 재미있는 사건과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우선적으로 기록하되, 객관적인 정보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식당 이름, 열차 시간, 관광지 입장료 등 객관적인 현장 정보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 좋다.
2. 여행기 초안 쓰기, 책의 구조 잡기
글감이 있다면 바로 글쓰기에 도전하면 된다. 여행책에서 콘셉트를 잡는 것이 꽤 중요하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다면 우선 글을 쓰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훈련이란 멋진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닌 꾸준하게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무엇을 써야 할까?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까? 고민하지 말고 우선 한 문장이라도 적는 것부터 시작해라. 여행지에서 일어난 독특한 경험도 좋고, 건물의 색깔 같은 아주 사소한 관찰 일기도 좋다. 시작하기가 정 어렵다면 그날 아침부터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 시간순으로 나열해보자. "뮌헨에서의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도미토리 밖에서 나는 소음 때문이었다. 다음 일정은 마리엔 광장에 가는 것이었다. 아침은 거기서 해결하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사건을 나열하다 보면 글 한편을 완성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것보다는 엉성한 글이라도 만들어내는 편이 훨씬 낫다. 어차피 초안은 수십 번 고쳐야 할 글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들도 처음에는 엉망인 글을 쓴다. 혼자 쓰기 힘들다면 블로그나 여러 매체를 통해 내 글을 공개해보자. 꾸준한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루에 한편씩 글을 쓰다 보면 글쓰기 실력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책의 콘셉트도 저절로 잡힌다.
원고가 쌓이고 주제까지 어느 정도 잡았다면, 책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인 목차, 프롤로그, 제목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두면 좋다. 원고를 써뒀으니 나머지는 출판사에서 알아서 해주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가질 수도 있다. 나중에 출판사와 어느 정도 협의를 거쳐 결정되는 부분이지만, 책의 목적과 구조를 저자만큼 잘 아는 이는 없다. 빠뜨리기 쉽지만 꼭 체크해둬야 할 부분이다.
3. 출간 제안하기
어느 정도 글이 쌓였다면 출판사에 내 원고를 제안해봐도 좋다.
크게 두 가지의 경로가 있다. 첫 번째는 내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직접 출간 의사를 밝혀오는 경우다.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블로그 등 외부 매체에 올린 글을 보고 연락 오는 경우가 많고, 특히 파워블로거 같은 홍보 효과가 큰 매체를 운영하고 있는 경우 많은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인기 없는 블로그가 아예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글과 기획이 좋으면 편집자의 눈에 띄기도 한다. 게다가 브런치처럼 글과 책을 중심으로 한 매체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를 통한 출간 기회도 더 많아질 것이다. 다만 이런 경우가 있다고 마냥 출판사에서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출판사에 직접 제안하는 편이 더 낫다. 물론 이 방법도 쉽지 않다. 출판사에는 수많은 출간 기획서가 수시로 들어오고, 내 기획서는 그중의 하나다. 거절은 다반사고, 내 원고를 받아주는 곳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출간을 꼭 하고 싶다면, 가장 적극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내가 완벽하게 준비를 해뒀다면 많은 출판사 중에 내 기획을 마음에 들어하는 출판사가 한 곳은 있게 마련이다. 이 외에도 저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독립출판물이나 전자책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경로가 있으니 책을 낼 의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해 보도록 하자.
4. 출판사와 계약, 본격적으로 책 쓰기
편집자에게서 책을 내보자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바로 출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 개인 의견일 경우 출판사 내부 회의를 거쳐 출간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샘플 원고를 더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긍정적으로 결정이 난다면 최종적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계약을 할 때 초보 저자들은 계약을 한 것만으로도 벅차 계약서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대부분 출판사에서는 출판 표준 계약서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어긋나는 부분은 없지만, 직접적으로 출간을 진행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인세, 원고 인계 날짜 등)은 꼼꼼하게 체크를 해본 뒤 진행하는 것이 좋다.
원고 쓰기는 이때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존에 내가 써뒀던 원고가 충분하니 거기서 약간 보태서 진행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는 원고질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원고 마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초안은 모두 뒤집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누구든, 특히 초보 저자라면 한 번쯤 위기가 올 것이다. 내 글이 책이 된다는 부담감 때문일 수도 있고, 같은 글을 여러 번 반복해 쓰다 보면 나중에는 뭐가 옳은 방향인지 알 수 없게 돼버리기도 한다. 이때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격려자는 함께 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편집자다. 잃어버린 방향을 되찾아주기도 하고, 가끔은 따뜻한 격려를 보내기도 한다. 물론 원고의 부족한 부분을 예리하게 찾아내서 다시 원고를 쓰는 일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더 좋은 책을 내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다.
원고가 완성되면 출판사에서는 구체적 출간 일정을 잡고, 편집에 들어간다. 여기서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과정은 복잡하다. 몇 번의 교정, 편집 디자인, 제목 결정, 그 외에도 몇 차례에 걸친 수정 작업과 마케팅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도 저자는 의견을 내고, 원고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5. 출간 후, 여행작가로서의 삶
출판사에서 마케팅을 시작한다. 서평 이벤트나 보도자료를 내고 저자와의 만남 등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저자도 책이 나온 소식을 블로그 등 매체를 통해 알리는 등 홍보에 적극 참여한다. 이후 온라인 서점에 책이 등록되고, 전국 서점에 책이 배포되어 진열대 위에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이 오른다. 비록 요즘의 책이 수명이 짧아 금세 매대에서 서가로 자리를 옮기긴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감격스러울 것이다. 책이 나온 후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기도 한다. 강연 요청이 여러 곳에서 들어오고, 잡지나 라디오 인터뷰 섭외를 받는다. 한 권의 책을 낸 후 여행작가로 계속해서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본 분들 중에는 한번 책을 내고 끝내는 사람은 없었다. 책을 통해 내 경험과 생각을 풀어놓고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 것은 생각보다 짜릿한 경험이다. 게다가 한번 책 쓰는 법을 습득하면 다음 책은 훨씬 수월하다.
알려지지 않은 책이라도 허투루 나오는 책은 없다. 저자의 보이지 않는 열정과 자신과의 싸움. 출판사의 전문적인 지원으로 탄생하는 것이 책이다. 출간 방법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책을 쓰는 것은 글쓰기 능력보다는 꾸준함과 버티기 싸움이다. 반대로 그래서 책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