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리생각 Jan 23. 2019

금융투자업계에 발을 대딛다

어쩌다보니 금융투자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겨울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바로 백수다. 한달을 백수로 지내다 보니 무료하던 차에 친구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 증권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니 같이 지원해 보자고 한다. 집안 형편도 녹녹찮은데 놀면 뭐하겠나 싶어 잠시 돈이나 벌자 하는 심정으로 덩달아서 입사지원서를 냈다. 친구따라 강남간 격이다.  당시는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호황의 영향으로  증시는 사상 유례없는 활황을 거두고 있었다. 아무 주식을 사더라도 자고나면 주가가 오르던 시기이다. 객장은 투자열기로 후끈했고  증권회사에 들어가면 돈방석에 앉는다는 이야기도 회자되었다. 입사지원자가 많이 몰려들다보니 예정에 없던 필기시험까지 치르게 되었다. 이런저런 채용청탁들이 들어오다보니 곤란함을 덜어보려는 의도였는지 예정에 없던 필기시험을 갑작스레 치르게 된 것이다.


대학졸업후 입대를 해 근 3년은 책에서 손을 놓았었지만 시험장소로 정해진 암사동 소재 모고등학교를 찾아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영어, 경제상식 등에 대한 필기고사를 치르고 며칠 후 면접시험을 보게되었다. 면접관이 입사지원서에 왜 이런 사진을 붙였느냐고 묻는다. 제대하고 동사무소에 주민등록 변경신고를 위해 찍은 사진이라 평상복 차림에 스포츠머리 상태였던 것이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갖고있던 사진을 붙인 것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성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 같았으면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별걸 다 물어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진지하게 답변을 했던 것 같고 면접은 싱겁게 끝나고 얼마 뒤 합격을 축하한다는 전보가 배달되었다.  몇 군데 더 입사지원을 했었고 절차가 진행중인 곳도 있었지만 어차피 오래 다닐 것도 아니고 한 2년 정도 다니면서 진로를 천천히 고민해보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먼저 합격통지를 준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회사의 업계에서의 평판이나 지명도 같은 건 달리 고려할 대상도 아니었다. 또 얼마간 명성이 있다는 회사들은 이미 신입사원 채용을 마무리한 뒤여서 당장에는 기회가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입사를 권유했던 친구와 나란히 같은 부서에 배치되었다.  


배치된 부서는 인수공모부로 기업의 상장을 도와주고 증권발행을 주선하는 업무를 하는 곳이어서 모두 가고싶어 하는 부서였다.  그 당시만 해도 증권시장에 상장하려는 기업들이 줄을 섰고 한 달에 상장을 위한 주식공모가 열기를 띠고 있었다. 물론 주식시장은 그해 4월 1,004포인트를 정점으로 하여 하락하기 시작했고 들뜨기만 했던 객장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주가가 떨어지자 뒤늦게 축제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손실이 커져갔고 노태우정부는 그해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 무제한으로 주식을 매입하겠다'는 12.12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조치에 따라 3투신(한국투자신탁,대한투자신탁,국민투자신탁)은 2조7천억을 차입하여 주식매입에 나섰고 그 영향으로 반짝 상승했던 주식시장은 정부가 2주만에 자금지원을 전격적으로 중단하자 다시 폭락세로 돌아섰고 이듬해에는 KOSPI가 600선까지 떨어졌다. 주가 폭락으로 증권회사로부터 융자를 받아 투자한 계좌들에서 담보가 부족한 상황들이 벌어졌고 증권사들에서 융자금회수를 위한 반대매매를 미루다보니 마침내는 주식을 처분하더라도 융자금을 다 갚을 수 없는 깡통계좌들이 쌓여갔다. 그해 10월10일 미뤄오던 반매매매를 전격적으로 실행함에 따라 손실을 크게 본 투자자들의 항의사태 등이 발생했고 증권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은 주식시장은 정부의 갖가지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는 456포인트까지 폭락하였다. 주식시장이 어렵다 보니 입사 선배들이 구가했던 좋던 시절은 다 지나가고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었다. 배정받은 우리사주는 속절없이 하락했고 당초 생각했던 직장생활에 대한 예상들은 모두 엇나가게 되었고 증권시장에서 결국은 발을 빼지 못하고 금융투자업권에서 월급쟁이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위의 3투신사는 많은 사람들의 꿈의 직장이던 것에서 부실금융회사로 전락하게 된다.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금융산업은 규제산업이라고 한다. 시장에 맡겨두면 시장의 실패가 발생할 때 금융산업 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들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의 정도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금융은 돈의 흐름이고 그 돈의 흐름이 경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핏줄과 같기 때문에 잘못 관리할 경우 전체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금융투자업계에 발을 내딛을 때만 해도 증권산업이 전체 금융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체계적인 규제 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크게는 발행시장에 대한 규제와 유통시장에 대한 규제로 나뉘어 있었고 자본시장도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때문에 "증권관리위원회규정집" 하나만 꿰고 있으면 다 해결되었다. 내가 맡게 된 업무는 발행시장 업무이었지만 증권이 발행되면 곧 유통시장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양쪽을 같이 알아야했다. 지금처럼 PC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여서 두꺼운 규정집을 들여다보는 것이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가 없도록 일처리를 하는 방법이었으며 법과 시행령, 시행규칙, 규정, 규정시행세칙 등으로 이어지는 맥을 잡아야 했는데 연관되어 있는 내용들을 한눈에 볼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고 힘든 작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법률정보시스템에 가면 법,시행령,시행규칙 3단 비교표도 있고 검색기능도 있어 관련되어 있는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같은 규정집의 앞뒤를 오가며 읽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엑셀이 지배적이지만 당시에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IBM 컴퓨터용 멀티플랜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사용하기도 불편했다)에 법,시행령,시행규칙,규정,규정시행세칙 5단 비교표를 하나하나 입력해가며 만들었다. 그렇게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니 어떤 업무와 관련된 규정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규정과 관련된 것들은 내게 물어보는 것이 빠르고 편한 길이 되었고 나는 '걸어다니는 규정집'이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법과 관련 해서는 1학년 때 법학개론 한 과목 들어본 것이 다였는데 취업하여 규정과 익숙해지다보니 논리적으로 규정을 이해하고 풀이하는 연습이 되었는지 리걸 마인드(legal Mind)라는 것이 형성된 것 같다. 길게 보면 이러한 훈련이 준법감시인으로 일을 오래할 수 있게 만든 기초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