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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생각 Jan 27. 2019

증권시장의 광기를 경험하다

   증권시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3저 호황으로 갑자기 증권시장이 달아오르면서 직장인이나 주부들 가릴 것 없이 그 열풍 속에서 한몫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때였다.  증권회사 객장에 배치된 영업사원들은 달리 영업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주문을 넣어주는 사람이 최고였다. 아무 주식이나 사도 다 오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증권분석이고 뭐고 다 필요 없던 때였다. 주문을 넣는 단말기가 영업점에 한두 개 정도에 불과했고 투자자들은 몰려드니 주문지 뒤에 만원권 지폐를 붙여서 주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주문단말기를 이용해 주문을 입력하는 여직원들이 그런 주문을 먼저 처리했다는 얘기다. 먼저 주문이 들어가야 먼저 살 수 있고 먼저 사는 만큼 많이 오르는 것이 법칙처럼 작용했다. 객장의 전광판을 온통 빨갛게 만들어 놓으니 사람들이 더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주가가 오르면 빨갛게 표시하는 것은 우리나라만 그렇다. 다른 나라들은 파란색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가가 오르면 보다 냉정하게 생각하라는 취지이다. 색채심리학에서 파랑은 이성, 빨강은 자극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고 카지노에서는 손님의 이성을 마비시켜 베팅을 유도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빨갛게 한다고 한다. 화투의 뒷면이 빨간 것도 같은 이치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사장의 지시로 엘리베이터의 표시 등까지 올라갈 때 빨간 불이 들어오고 내려갈 때 파란 불이 들어오도록 바꾸었다. 비이성적 광기는 많은 상처를 남긴다.


   깡통계좌 정리가 시작된 1990년 10월 10일, 증권사의 객장은 깡통계좌를 보유한 투자자들의 집단행동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명동의 증권빌딩에서는 흥분한 투자자들이 증권사 객장들을 돌아다니면서 소동을 피워댔고 내가 다니던 회사의 지점에서는 몰려드는 투자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셔터를 내리던 한 직원은 어느 투자자의 우산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갔고 진단 결과 회복이 어려운 내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CCTV가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서 가해자를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그 직원은 상당히 오랜 기간 병원신세를 졌고 정상적으로 업무에 복귀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깡통계좌 강제정리는 마치 군사작전처럼 전국 25개 증권사에서 새벽 2시부터 일제히 실행에 들어갔다. 그날 아침 동시호가에 일제히 매도주문을 넣고 그 물량을 증시안정기금에서 받아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악성 대기 매물이 한꺼번에 해결되자 증권시장은 그 후 2주 만에 30%가 넘는 폭등세를 나타낸다. 이로 인해 정리매매를 당한 투자자들의 원성은 더 커져만 갔다. 이 사태의 교훈으로 지금은 담보가 부족한 계좌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정리매매에 들어가게 되었고 투자자들은 신용이나 미수 등의 위험에 대해 뼈저린 학습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증권회사에 가면 남들이 모르는 뭔가 중요한 정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증권회사 직원을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게되면 정보 하나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종목이 오를지 찍어달라는 이야기다. 증권에 투자한다는 사람들이(투자자라고 말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표현함) 그냥 돈만 들고 증권회사에 맡기면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족집게처럼 오를 종목을 찾아 투자하는 줄 알던 시절이다. 그러니 계좌를 관리하는 증권회사 직원들이 모르는 것은 매 한 가지였다. 마바라와 메사끼라는 증권가의 은어가 있다. 마바라는 귀가 엷어 풍문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매매하는 사람을 말한다. 메사끼는 경험상 어떤 종목을 언제 사면 좋다는 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메사끼를 갖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최고라고 생각되던 시절이다. 증권분석의 기본 개념도 잘 모르지만 매매하는 감각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간혹 기업의 재무제표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찌라시라고 부르던 정보지와 주가 그래프만 보았다. 심리도, 이격도 등 가술적 지표에 의지하곤 했다.  주식투자를 본질적으로 심리게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증권분석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우리 증권시장에 도입된 것은 1992년 자본시장 개방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시장 개방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주식시장 참여가 가능해지면서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주식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저 PER주'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시장에서 의미 있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주식에 투자가 집중되었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의 바로미터는 PER(=주가/주당순이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 PER주에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러한 주식들이 시장을 상회하는 수익률을 제공했고 저 PER주들로 분류되던 주식들의 외국인 투자한도가 소진되면서 다시 '저 PBR(=주가/주당순자산)'주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소위 자산주로 그동안 시장에서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던 대한제분 등 부동산 자산을 많이 보유하던 주식들로 시장의 관심이 이동하였다. 증권회사들에서는 외국인 투자를 중개하기 위해서 리서치 부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조사부 등으로 명명되는 곳에서 리서치 업무를 해왔지만 상장기업의 기본적인 재무상황과 기술적 지표를 묶어서 간략하게 페이퍼를 만들어내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었다. 이제 외국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리포트를 만들어내려다 보니 생소하기만 했던 PER, PBR 등의 개념들이 도입되고 밸류에이션이라는 증권분석의 기초적인 작업들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자본시장 개방을 계기로 시장 참여자들이 보다 똑똑해져 갔고 시장도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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