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부터 자본시장이 개방됨에 따라 외국인의 국내 주식 브로커리지 업무가 증권회사들의 새로운 경쟁의 영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회사마다 국제영업부서를 새로 신설하여 엘리트 직원들을 배치하고 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국제영업부와 국제금융부가 신설되어 국제영업부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브로커리지 업무를, 국제금융부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기업의 외화증권 발행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국내 영업에서는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기가 녹녹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이 열리는 시장에서는 특단의 대책을 선제적으로 펼쳐 시장점유율을 선점하는 전략이었다.
주간 단위로 보고되는 국제영업부의 실적은 처음부터 업계 선두권을 내달렸다. 주간 단위로 열리는 그룹의 사장단 회의에는 이러한 국제영업의 성과가 계속 보고되었고 국제영업부의 비즈니스의 확장과 관련된 뉴스들이 수시로 보도자료로 작성되어 언론사들에 배포되었다. 해외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로드쇼가 런던, 뉴욕 등 국제금융의 중심지들에서 진행되었고 외수펀드들이 역외에 설정되어 나갔다. 해외 유수의 금융투자회사들과의 업무제휴를 위한 양해각서(MOU)들이 체결되었다는 것도 뉴스화 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비즈니스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었다. 외수펀드는 역외에 회사 돈을 넣고 최대한으로 차입을 일으켜 만들어 놓은 무늬만 외수펀드였다. 그 외수펀드를 통해 들어온 주식 매매주문들이 국제영업의 실적으로 잡히는 것이었다.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 국제영업의 실적을 만들기 위해 이 외수펀드들에서 지속적으로 단타매매가 이뤄진 결과 거래비용과 거래손실 등으로 펀드의 순자산은 계속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거래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펀드가 여럿 운영되다 보니 각 펀드마다 누적되어 있던 결손금들이 회사의 장부외 부실로 남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국제영업의 성과는 속으로는 시한폭탄이 된 것이다.
숨겨 놓은 부실을 해결하고자 등장한 해법이 바트화 가치에 연계된 파생상품(TRS)였다. 당시 태국은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바트화는 인위적으로 실질가치보다 높게 유지되었다. 당시 JP Morgan은 이런 바트화의 환율이 계속적으로 유지되면 약 30%의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는 수익구조를 갖고 있고 또 태국이 고정환율제도를 바꾸지도 못할 것이어서 리스크는 거의 없다고 하며 이 상품을 팔고 다녔고 내가 다니던 회사를 포함한 국내 금융회사들이 동 상품에 투자하게 되었다. 동 상품에 투자해 발생할 수익으로 누적된 역외의 부실을 털어내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바트화에 대한 헤지펀드들의 투기적인 매도가 이어지면서 아시아 신흥국들의 통화가치가 급락하게 되었고 외환위기로 치닫게 된다. 그 결과로 태국은 더 이상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위 파생상품에 투자한 회사들은 천문학적 손실을 경험하게 되고 일부 회사를 제외하고는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판매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진행하다가 JP Morgan과 소외 합의를 통해 또 다른 장외파생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지급보장을 계열회사들이 하게 되면서 장차 그룹 전체가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된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당시 JP Morgan은 바트화 채권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위 상품을 적극적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 상품을 사는 투자자와는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서 이해상충 거래에 해당하는 것으로 불법적인 행위였다. 세계 유수의 금융회사가 이런 거래행위를 버젓이 해놓고는 클레임을 제기하는 국내 금융회사들에 대하여 정책당국을 압박하여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997년의 외환위기 속에서 우리나라는 IMF에 거의 백기 투항하는 사정에 몰리면서 해외의 거대 금융자본으로부터도 상당한 압박을 받았었다. 결과적으로 동 상품의 투자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국내 금융회사 중 6개 회사가 퇴출, 청산되기에까지 이르렀고 한 회사만 꿋꿋하게 소송을 진행하여 승소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장면이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라고 강요하던 국제금융자본의 민낯을 엿볼 수 있던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