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회사에 들아가 발행시장 업무를 5년간 하다 보니 이제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발행시장 업무를 집대성하여 “1994 발행시장 실무”라는 책을 편집, 발간한 이후라 이제 더 해보고 싶은 일도 없고 그 분야에서 새로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부서로 전보발령을 신청하여 배치받아 간 곳이 사장을 보좌하는 스탭부서였다. 본사 영업부서들의 업무가 잘 돌아가는지 점검하여 보고하는 업무를 할당받았다. 당시 증권회사의 업무영역은 크게 Brokerage, Underwriting, Dealing으로 구분되었었고(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첫 번째가 중개업무이고 두 번째가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인수업무, 세 번째가 고유자산 운용업무이다. 고유자산 운용업무는 지금은 Proprietary Investment(PI)라고 하여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주로 국내 주식을 투자대상으로 했었다. 당시에는 자본시장에는 투자할 대상도 주식, 채권 외엔 없었고 증권회사 입당에서 채권은 투자대상이라기보다는 중개영업의 대상이었다. 증권회사의 조달금리가 높아 채권에 투자해서는 수익 기회가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고유자산으로 상장주식에 투자하는 업무를 주식부에서 해왔는데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내게 그 원인을 분석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어떻게 접근할까 생각하다가 모든 증권회사의 고유자산 주식투자 성과를 비교해 보기로 하고 최근 3년간의 주식투자성과를 보았더니 2개 회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KOSPI를 하회하였다. 어느 회사나 고유자산 투자업무에는 그 회사에서 주식투자의 에이스를 선발하여 배치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그 성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평균적으로 KOSPI를 약간 초과하는 성과를 낸 것은 앞서의 두 회사가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유자산을 투자할 때에는 거래세를 제외하고는 중개수수료 등 다른 거래비용이 부과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형편없는 성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성과가 좋았던 두 회사는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발군의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지금까지도 가치투자의 철학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신영증권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한신증권(나중에 동원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가 한국투자신탁을 인수하여 지금은 한국투자증권이 됨)이었다. 이 두 회사는 투자에 대한 나름의 철학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다른 회사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성과를 냈던 요인이었다고 해석되었다. 그때그때 시장에 대응하다 보면 갈 길을 잃고 마는 것이 투자의 세계이고 다른 증권회사들은 그러한 모습에서 헤어나지 못했었기 때문에 결과가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주식부장이 교체되었는데 새로 임명된 주식부장은 엘리어트이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파동은 일종의 자연법칙이고 주식시장도 그러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며 그러한 자연법칙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세력이 각종 이벤트를 각색하여 교묘하게 배치한 결과가 주식시장의 파동이라고 설명하였다. 음모론적 시각에서 주식시장의 대세의 흐름을 보아 시장의 변곡점을 만들어 내는 큰 사건들이 의도적으로 계획되어 배치되어 파동을 구성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동은 자연법칙에 따라 피보나치수열을 이뤄간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엘리어트 파동이론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주식시장의 흐름을 잘 분석하면 불규칙적이지만 일정한 법칙 아래에서 움직이는 대세의 흐름을 읽어내어 큰 수익 기회에 참여할 수 있고 대세하락을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진이 주식부장의 이러한 논리에 감흥을 받았는지 모든 영업직원을 대상으로 엘리어트아론 교육이 진행되었다. 돌이켜 보면 하나의 가설과 같은 파동이론을 마치 감추어진 보화라도 발견한 듯 법석을 피워댔지만 증권투자나 중개영업에 어떤 도움이 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당시 지점 영업사원 증에서 가장 탁월한 영업성과를 내던 사람은 초단기매매의 달인이었다. 그 직원의 매매방법은 ‘현미당’ 불렸는데 “현금, 미수, 당일”의 줄임말이다. 절대로 신용(대출)을 사용하지 않고 현금증거금 범위 내에서 당일 중에 사고판다는 뜻이다. 그날그날의 시장 상황을 보아서 당일 중 사고팔아 거래비용을 제외하고 조금이라도 남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종목을 골라 현금증거금률의 역수만큼 레버리지를 활용하는 패턴이었다. 거래하는 모든 종목에서 다 이익을 낼 수는 없겠으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익이 손실보다 크면 계속 돌아가는 구조이다. 예를 들면 전일 종가 기준으로 상한가 잔량이 많은 주식은 다음 날에도 강한 흐름을 지속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매수 고려대상 종목이 되는 식이다. 그때만 해도 시장의 비효율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 만큼 그러한 매매 전술이 통했던 것이다. 매수한 종목은 당일 중 모두 팔아 다음날까지 들고 가는 포지션이 없으니 투자위험은 당일 중 가격 변동 범위로 제한되기 때문에 리스크를 제한하는 나름 현명한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증권회사 주머니만 두둑하게 하는 방법이다. 투자시계가 하루에 불과하니 상승하는 시장에서는 수수료만 떼이고 남는 게 별로 없게 된다, “구르는 돌에 이끼 끼지 않는다”는 개념에서 볼 때 투자손실이 제한되는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라고 이름 붙이기는 어려운 전술이다. 선물거래시장에서는 레버리지 효과가 크고 시장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발생하면 포지션을 청산하는 투기적 거래자를 스컬프터라고 부르는데 현물시장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 것은 지속되기 힘든 구조라 할 것이다. 증권회사의 지점영업이든 고유자산운용이든 자산의 투자활동과 관련된 비즈니스이고 그 비즈니스의 핵심은 좋은 투자를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결과는 기대와는 다를 수 있어서 항상 좋을 수는 없지만 투자하는 로직과 근거가 합리적인 기대를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브로커리지 서비스라고 할지라도 투자자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고 그 가치는 투자판단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실은 고객 우선을 천명하면서도 브로커의 주머니만 챙기는 경우가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