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기억 1

by 커피탄 리

그곳은 내가 처음으로 떠올리는 장소이다. 만개한 벚나무가 피어있는 넓은 자갈마당. 그 마당과 인접해 있는 교회 옛 건물 반지하에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이 있었다. 그곳에 살 때, 나는 교회 부속 어린이집에 다녔다. 일곱 살 크리스마스 선물로 포트리스 장난감을 받았다. 자갈 마당에서 사촌과 함께 뛰어놀며 한 여자 아이를 울린 기억이 난다. 난 그곳에서 약 이 년을 살았다. 내가 살았던 수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짧게. 우리 부모님이 교회 관리집사님 이셨냐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교회 부속 건물에 살 수 있느냐고? 아니다. 나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교회에는 총 다섯 명의 부목회자가 있었는데, 그중 한 가정이 우리 가정이었다. 내 밑에는 세 살 터울인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체구가 아주 작은 귀여운 여동생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반지하 건물에서 산지 반년 만에 우리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신축한 별관에서 살게 되었다. 그 건물에는 다섯 명의 부목회자 가정이 살고 있었다. 목회자 가정 아이들이 모두 자갈 마당에 나오면 마당은 어린이 대공원의 풍경처럼 소란스러웠다. 애 우는 소리, 애들 뛰어다니는 소리, 이제 막 애 엄마가 된 사모들의 목소리. 그런 소란 가운데 내가 얼굴을 기억하는 몇몇이 있었기도 하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가까웠다. 서로의 목소리는 집 벽에 귀를 대면 다 들렸다. 그 가운데서 친한 무리와 친하지 않은 무리가 생겨났고, 수많은 이야기꽃들이 피어났다. 당시에 나는 감천에 있는 큰엄마 집에 무척 가고 싶어 했다. 그런 갑갑하고 제한받는 환경을 벗어나고 싶었다. 당시에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몰랐다. 보이는 것이라곤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뿐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감시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은 힘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미술이란 것을 배웠다. 이전에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지만. 나의 그림 기벽은 네다섯 살 전후에 시작된 것으로 예상된다. 집에 손님만 오면, 손님을 잡고 내가 원하는 동물을 그려달라고 했다던데. 내가 여덟 살이 되어서 엄마는, 이런 미술에 흥미가 다분한 나를 결국 학원에 집어넣었다. 학원이라고 해 보았자, 원생 두세 명 정도의 작은 교습소였다. 원장님은 교회 집사님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그러하듯이 나는, 누군가 시켜서 하는 미술에 몹시 싫증을 냈다. 선 긋기, 붓 터치 연습하기. 그런 것들은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내게 크레파스만 주어진 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무언가를 그려낼 자신이 있었다. 실재로도 그렇게 했다. 나는 그 과정을 즐겼다. 당시 유행하던 티비 프로그램인 ‘불멸의 이순신’을 보고 드라마 속 장면을 상상에서 재조합해서 그려냈기도 했다. 얼마 못 가 그 미술 교습소를 그만두었다. 내가 몹시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틈만 나면 뭔가를 그려대거나 만들어냈는데, 찰흙을 가지고 자전거 헬멧에 씌워 이순신 투구를 만들거나, 스티로폼과 은박지를 이용해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중 신기했던 것은, 신문지로 만든 총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게임인 서든어택에 나오던 총 이었다. 나는 그 모양을 몇 번 보고는 그 총을 본떠서 실재와 흡사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서울에 사는 사촌에게 선물로 주었다. 숙모는 그것을 사촌을 두들겨 패는 몽둥이로 썼다. 어찌나 단단하게 만들어졌던지 숙모가 사촌을 때려도 잘 부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의 내가 만들거나 그렸던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회에서만 살아온 내게 교회는 날 아프게 하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해외로 선교를 나가셨다. 엄마와 나는 어린 동생과 함께 자갈 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차 안에서 기도를 했다. 교회는 내가 있기 싫어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곳이었다. 항상 난 내가 왜 교회에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지. 이렇게만 쓰면, 독자들 가운데 몇몇은, 교회가 아주 나쁜 곳이며, 내가 교회 욕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의도는 그게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다. 나는 다만 여덟 살의 내가 느꼈던 내 주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살던 곳은 영도라는 곳이었다. 영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바다는 없이 자갈 마당이 내 섬이었고, 교회 건물들이 날 둘러싸고 있는 바다였다. 내 영역은 교회와 교회 안의 집. 교회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야 반 학기도 다니지 못하고 서울로 이사를 갔으니, 기억이 날 턱이 없다. 태풍이 심하게 오는 날 학교 언덕을 오르다가 우산이 뒤집어졌던 기억이나, 엄마 지갑에서 오천 원을 훔쳐 유희왕 카드 세트 댁을 샀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그 시절은 내가 지금 영도에 느끼고 있는 기분 그대로 우울했고 우중충했다. 영도는 비바람이 자주 부는 곳이었다. 안개가 자주 짙게 끼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뾰족해지는 산 경사를 깎아, 아파트들과 복지관, 상점들을 세웠으며, 그 건물들은 매우 볼품없었다. 산꼭대기에서는 점 같이 바다의 얼굴 위로 솟아난 선박들이 보였다. 엷고 가느다란 흰 구름이 하늘 낮게 흩어져 있었다. 안개가 끼면 섬 밖이 보이지 않고 바람이 몹시 세게 불어 우산을 쓸 수가 없다. 아무튼, 영도는 그런 곳이었다. 영도는 부산 내지에서도, 영-아일랜드라고 불릴 정도로,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여권을 발급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특수한 곳이다. 여덟 살의 나는 영도 살이를 그렇게 탐탁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