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기억 2

by 커피탄 리

우리 가족이 영도를 벗어난 것은 내가 아홉 살이 되기 전이었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경기도 광명의 한 교회에 담임 목회지를 임직 받으셨다. 우리 가족은 상당히 즐거운 기분으로 이사를 갔는데, 후에 어떤 폭풍이 밀어닥쳐 올지는 누구도 몰랐다. 경기도 광명에서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곳엔 비둘기가 많았다. 도로 위에 비둘기가 죽은 시체도 많았다. 그곳에서 나는 동호라는 아이와 놀았다. 동호는 광명에 일 년만 살다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나와 즐겁게 놀았다. 그 아이가 떠나버리고 나서 나는 기수와 동명이 형, 슬빈이 형이랑 같이 놀았다. 기수란 놈은 잘 놀다가 교회 지하 방에 버려져 있던 쇠파이프를 들고 나를 내려치려 달려들었다. 동명이 형과 슬빈이 형은 주먹으로 내 명치를 가격했다. 그들을 떠올리면 그런 기억밖에 들지 않는다. 꿈에서, 그들은 나를 비둘기 시체가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내게 비둘기 시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겁먹게 했다. 아, 마주하기 싫은 기억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참 끔찍한 일이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피아노를 쳤다. 교회 한 권사님의 집에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당시 피아노를 치는데 꽤나 재미를 들려했었다. 내 기억에, 나는 동명이 형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다.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던 그 권사님은 백발에, 눈이 올빼미 같이 크고 볼과 턱에 살이 많이 찐 통통한 체구였다. 나는 그 권사님께 자주 혼났던 것 같다. 영도시절부터 내 주변 어른들 말을 무지하게 듣지 않던, 나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피아노 학원은 산 위에 있던 광명동초등학교 뒷골목으로 내려가면 있었다. 그 뒷골목에는 유독 비둘기 시체가 많았다.
그곳 광명에서 나는 처음으로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보았다. 무려 오만 원어치의. 그건 완구용 반자동 소총이었는데 위에 언급했던 사촌의 아버지인 외삼촌으로부터 받았다. 나와 사촌은 여동생을 괴롭히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교회 건물 안에 쏙 들어가 있던 우리 집에서, 여동생 울음소리가 밖으로 자주 퍼져나가곤 했다. 무슨 색소폰에서 나오는 음악처럼. 그럼 의석이 놈의 할머니인 최 집사님-교회의 관리집사님-이 문을 빼꼼 열고 그 소리를 듣곤 했다. 의석이 놈은 또 나와 원수 중의 원수로서 내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준 녀석이다. 그 녀석은 여자인 친구가 보는 앞에서,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린 주제에, 나에게 대들었다. 그 장면은 아직까지 머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나는 또 교회에 붙어 있던 어린이집에서 자주 놀았는데, 그때 방석을 던지고 놀다가 원장 집사님한테 크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 집사님은 “목사님 아들이 그래도 돼?” 라며 날 혼냈다. 나와 함께 놀았던 다른 아이들은 혼나지 않았다. 대체 내가 목사님 아들인 것과 방석을 던지면서 논 것이 무슨 관계란 말인지. 당시 나는 그런 소리들을 꽤 많이 듣고 살았다. 그건 당시 내게 스트레스였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도 율법을 강요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약 이 년 만에, 우리 가족은 그 교회에서 쫓겨났는데,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 교회는 당시 두 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원로 목사님을 지지하는 쪽과 담임 목사인 우리 아버지를 지지하는 쪽으로. 원로 목사님을 지지하는 쪽은 우리 아버지를 못 마땅해핬다. 그들은 우리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일에 시비를 걸었다. 그들 중에 나랑 같이 놀던 그룹에 속한 아이들의 부모님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두 세력이 보이지 않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기가 막힌 틈을 타서 신천지가 우리 교회에 들어왔다. 신천지는 가장 열성적인 척을 하며, 우리 아버지의 프로그램을 따랐다. 그리고 모두에게 성실하게 봉사를 하며 모두의 환심을 샀다. 그 과정에서 돈을 얼마를 썼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성공적으로 교회 안에 안착한 그는 이제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삼억을 주고 교회를 사서 교회에 들어왔다나. 옳다구나 싶었던 원로 목사님 지지파는 그 소문을 악마의 사과처럼 덥석 베어 물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아버지를 몰아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집단적이었고 광신적이었다. 그들은 우리 아버지를 공격했다. 어떻게 목회자가 삼억을 주고 교회를 살 수 있느냐 하는 목소리들이 교회 안을 소란스럽게 했다. 더욱이 그들은 나를 이용했다. 그들 중 하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휴가 즐겁게 보내고 왔니?”라는 말에, 어린 나는 멋도 모르고서 “네. 즐겁게 보내고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말의 꼬리를 물고서, "어떻게 목회자 가족이 휴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느냐", "돈이 얼마나 많았길래"라고 또다시 말을 만들어냈다.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아버지의 생활비는 월에 이백 만원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소문이 무슨 예수님 말씀처럼 통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 아버지를 공격했다. 뱀 새끼 한 마리가 흘린 말이 이 정도로 시장바닥을 더럽게 할 줄이야. 나는 신천지 배 씨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우리 가족과 교회의 선한 식구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음을 잊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는 성도의 가면을 쓴 자들의 공격을 버티다 포기하셨다. 결국 우리 어머니는 산속의 기도원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거의 죽으려고 하셨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시며, 말씀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나와 내 어린 여동생은 대구의 친척에게로 보내졌다. 그때의 그 암울한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부모님께 그때 광명에서의 일을 말하면, "허허" 하고 그냥 넘기시겠지. 하지만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그건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오는데 숨을 데 하나 없는 전쟁터였다. 우리 부모님은 주님의 선하신 깃발 아래로 피하는 것을 선택했고, 선하신 그분은 우리 가족을 안전한 데로 인도해 주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세 번째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북삼초등학교. 당시 내 나이는 열 살이었다. 북삼에 가기 전까지는, 경상북도에 구미가 있는지, 구미 옆에 칠곡군이라는 곳이 존재하는지. 칠곡군 안에 북삼읍이라는 곳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덜컹거리는 이삿짐 트럭에는 나와 내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은 미미 인형을 들고 있었고, 나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운전 중이셨고, 엄마는 창밖으로 스쳐가는 나무, 간판 따위를 보고 계셨다. 내게. 북삼, 그곳은 깎아지른 험준한 산들이 둥글게 진을 치고 있는 분지 안에 있었다. 공장단지는 없없고, 키 작은 집들이 가로수에 가려 동네 군데군데에 서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몇 단지가 동네 한 중앙에 있었고, 동네 한 중에서 갈대밭을 건너면 또 작은 아파트 단지 두 개가 있었다. 그중 한 아파트 단지에 우리 가족은 살게 되었다. 아파트 이름은 화진 금봉이었다. 아파트 주변으로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논밭이 휑하니 들어서 있었다. 나는 아파트를 두르고 있는 논밭을 지나 학교를 가야 했다. 학교에 가기까지는 열 살인 나의 걸음으로 약 이십 분이 걸렸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은 나를 경계했다. 선생님도 날 영 탐탁지 않아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금태 안경을 끼고 까까머리에 목 뒤에 살이 찐 중년 남성이었다. 항상 쥐 색깔 정장을 입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 중 하나는 내가 무슨 말만 걸면 비꼬듯이 대답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작은 내 체구를 가지고서 웃음거리를 삼았다. 나는 새로운 학교에 가기 싫었다. 내게 초등학교 삼 학년은 괴로웠다. 사 학년이 되어 형편은 좀 나아졌는데, 그건 내 앞으로의 내 인생에 큰 인상으로 남은 인제란 아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교회 집사님 집 아들이었다. 교회 소그룹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는 바람에 나는 그와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집에서 CD 삼국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게임은 그 당시에 나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축구도 학교에서 끼지 못했고, 야구라는 스포츠는 전혀 몰랐던 나로서는 집에서 만화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일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날, 창가 베란다로 노란 햇빛이 내리고 있었고, 아파트 화단의 풀들은 빛이 났다. 나는 베란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고, 피부가 검은 인제는 내게 다가와 내가 게임하는 것을 구경했다.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다가가려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아이는 삼국지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날 교인들은 우리 집 작은 거실에 모여 성경 나눔을 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음식을 먹었다. 인제는 자기 어머니가 갈 때까지 내 곁에 남아 게임을 구경했다. 나는 인제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이 시골에, 같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우리는 첫 만남에 그렇게 친해지지 않았다. 그 아이와 친해진 날은, 그다음번 소그룹 모임이었던 때로 기억한다. 교회 사모인 우리 엄마와 나, 그리고 교인들은 동네의 한 음식점에 있었다. 음식점에는 오락기계가 있었고, 나는 그 기계에서 게임을 했다. 인제는 자연스럽게 자기 어머니를 따라왔다. 그리고 내 옆에서 게임을 했다. 게임은 ‘킹 오브 파이터 4’. 나는 철퇴를 돌리는 캐릭터를 선택했고, 하는 족족 이겼다. 인제는 그 모습을 보고 재밌어서 자기도 게임에 참여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면서 이겼다. 그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날도 창문 안으로 노란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뒤로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그와 나는 항상 붙어 다녔다. 그는 내게 처음으로 야구를 가르쳐 주었다. 야구라는 것 자체가 있는지 몰랐던 나로서는 야구는 혁명적인 운동이었다. 우리는 글러브를 야구 배트 위에 끼우고 갈대밭을 넘어 다니며 놀았다. 나는 그의 집에서 자주 잤는데, 내가 했던 최초의 외박이었다. 우리는 밤새 ‘마구마구’나 ‘피파 2’, ‘메이플스토리’를 했다. 우리는 자주 싸우기도 했다. 우리와 함께 노는 한 명의 친구가 더 있었다. 이름은 태현이었다. 태현이와 인제와 나, 이렇게 셋은 편을 바꿔가며 서로를 무시하고, 서로를 헐뜯기도 했다. 둘이서만 있을 때는 그렇게 정다울 수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인제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도 꽤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인제는 친구들이 많았고 인제의 친구들이 자연스레 내 친구들이 되었으니까. 지금도, 생각나는 얼굴들과 이름들이 있다. 물론 그들은 떠돌이인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북삼에서,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꽤 평탄한 생활을 했다. 그것이 전적으로 인제 덕분은 아니겠지만. 인제의 도움이 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지난 광명에서의 기억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삼 년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육 학년이 되었다. 육 학년은 성적으로나, 인간관계로나 완벽했던 한 해였다. 나는 학급에서 부반장을 맡게 되었다. 그를 통해 책임감도 배워갔다. 그때 있었던 많은 일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난 야구도 축구도 꽤나 잘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민아라는 아이를 좋아했던 것도. 민아도 나를 꽤 좋아했는데, 우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이사를 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또 다른 곳으로 임직을 받으셨고, 우리 가족은 또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정든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또 떠나는 기차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다시는 인제같은 아이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겐 인제와 친구들이 전부였다. 그때는 아직 하나님도 예수님도 잘 알지 못해 내겐 의지할 곳이 없었다. 부모님은 떠돌이인 내 심정을 진심으로 공감해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말리거나 타이를 생각만 했다. 그렇게 나를 실은 기차는 부산으로 왔다. 영도를 떠나 부산에 육 년 만에 돌아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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