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는 육 학년 이학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다. 새로운 학교, 학급, 아이들은 전의 시골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뭐랄까 더 활기가 있었달까? 그러면서도 부산 아이들은 날이 서 있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짙어 보였다. 모든 것이 시골과 달랐다. 반면, 북삼의 아이들은 마음이 둥글둥글했고 따뜻했다. 우리 아버지가 부목사로 부임한 교회는, 광안리의 바닷바람과 수영시장의 생선비린내를 그대로 받고 있는 곳에 있었다. 시장가와 번화가가 같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활달했고 소란스러웠다. 떡볶이 구루마가 한 골목에 두 군네나 있었는데. 시장 안에 것까지 합하면 네 군데나 되었다. 그 외에도 순대를 파는 곳이 하나 더 있었고, 닭강정을 파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시장통은 늘 사람으로 바글거렸고, 위에 설명했던 자극적인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늘 가난했다. 나는 몸이 왜소한 데다가 안경을 꼈다. 고개도 늘 숙이고 다녔다. 이 넓고 북적대는 곳에 의지할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으니 말이다. 학교에서, 나보다 더 키가 작은 여동생과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이 내게는 가장 쓸쓸했다. 초등학교에서 기억나는 일은 별로 없다. 있다면 한 가지인데, 이것이다. 첫 체육시간, 아이들이 축구를 잘하느냐는 말에 나는 자신감 있게 잘한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시골에서 잘하기도 했고, 자신감 있는 태도가 도시의 아이들에게 더 좋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딜 가나 당당하게 살라는 어머니의 주문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운동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급우로부터는 충격적인 말까지 들어야 했다. “너 어디 가서 축구 잘한다고 말하지 마.” 사소해 보이는 이 말은 내 중학생, 아니 고등학생 시절까지 내 가슴에 돌멩이처럼 박혀 들었다. 경기 전후로 변해버린 아이들의 표정과 태도에 내 자신감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나는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더욱이 내가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도, ‘키 작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지 곱지 못했다. 아이들은 날 힐끔거리면서 쳐다보았고 뭐라고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나의 낮은 자존감은 좀처럼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아무리 이사를 다녔어도, 아이들과 잘 어울리던 나였는데, 여기서는 이상하게 아이들이 날 거들떠보지 않았다. 부모님도 늘 교회 일로 바빴으니 나는 어디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다.
중학교에선, 내가 어려서부터 계속 그리던 그림을 그렸다. 주로 만화캐릭터가 많았다. 아이들은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날 대단하게 보거나 우습게 보았다. 내 그림을 훔쳐 가서 저들끼리 돌리며 내게 돌려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내가 설 곳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때, 어디든지 물들기 좋아하고 잘 물드는 내 성격이 드러났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 한 무리의 불량한 형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난 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또래 아이들과 친해졌다.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아이를 괴롭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내 평생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오명을 남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후에,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사과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간신히, 내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 연락처를 찾아서 연락을 해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중학교 이 학년 말, 아니 중학교 삼 학년 초가 될 때까지 나는 약간은 삐딱한 삶을 살았다. 교회를 다니고,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물론 이 사실을 우리 부모님은 모르신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일들을 다 기록할 수도 없고 떠올리기도 싫다.
내 체구는 여전히 작았다. 중학교 삼 학년이 되어서도. 중학교 삼 학년이 되기 전, 한 가지 사건을 겪고 난 굉장히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그전까지 멋도 모르고 떠들고 나대던 아이였다면 말이다. 중학교 이 학년 말, 내가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창 독서실에 붙어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어울려 놀던 친구 가운데 하나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여자친구에겐 또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박솔빈이었다. 내 생애, 앞으로 두 명의 박 씨를 더 만나게 된다. 이 총 세 명의 박 씨들이야 말로 내 인생을 바꾼 인물들이다. 그중 첫 번째를 소개하려 한다. 그 아이는 어마어마한 일진 소녀였다. 그 애는, 중 일 때부터, 중 이인지 중 삼짜리 오빠랑 사귀다가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웠고 술도 마셨다. 눈화장도 진하게 하고 다녔을뿐더러, 치마도 짧았고 얼굴도 뽀얗고 예뻤다. 그 아이의 존재는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자극적이었다. 비록 멀리서 보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다가 그 아이와 가깝게 지낼 기회가 생겼다. 그 아이가, 내 친구의 여자친구와 함께 내가 다니던 독서실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말을 텄다. 나는 그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 굉장히 애썼다. 얼마나 애썼던지, 보던 그 애는 내가 불쌍해서 내게 번호를 줬던 것이다. 심지어, 그때 그 아이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물론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그 아이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연락했다. 그 아이도 내게 꼬박꼬박 답장해 왔다. 나는 그게 블루 시그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나는 마음속에 두려움과 부품의 악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내 허영이 두려움을 품에 안고 자주 속삭였다. ‘네가 이 애랑 사귄다면, 너는 일진이 되겠지. 그럼 네 체구로 널 무시하던 다른 아이들도 널 달리 볼 거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겠어?’'저 애랑 사귀면, 너는 남자에게 금지된 일도 하게 될 걸?' 그럼 나는 속으로 말하곤 했다.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 엄마의 하나님, 내가 좋은 거, 재밌는 거 다 못하게 하는 하나님이 이 일을 막으실 거거든.’ 이 일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예감대로 계획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내가 한참 희망에 부풀고 있을 즈음, 나와 그리 친하지 않던 한 일진 소년이 내게 연락을 했다. 용건이란, 내가 그 여자애와 연락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고 있다고 답했고, 평소보다 더 왜소해져서는 그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아이는, 내가 이제 그 애 남자친구이니 그 애랑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때 하늘이 와르르하고 내 앞에 빌딩처럼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때의 심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난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계집애가 날 가지고 놀았구나.','난 이 남자 애한테 찍혔구나.' 그 이후 난 학교에서 책상 위에 엎드려만 있었다. 얼마나, 얼마나 쪽이 팔렸던지. 박솔빈, 그 여자 애는 어느 날 우리 반으로 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애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너 얘한테 차였다며?”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여자애는 날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XX아,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막아줄게.”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가식적인 얼굴을 해는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중학교 삼 학년 때 나는 사 반이었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내 일 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와 학급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셨다. 우리 반은 모두가 다 함께 놀았다. 물론 모든 급우들이 다 같이 몰려다니며 논 건 아니지만, 열두 명 정도는 그렇게 놀았다. 다행히,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몰아치는 세파 가운데서 나는 의지할 만한 무리를 찾은 것이었다. 우리는 늘 몰려다니며 축구를 하고, 피시방엘 가고, 심지어 학원도 같이 다녔다. 그러니 성적이 오를 리가 없다. 그 인연은 무려 십 년이나 이어지는데, 후에는 그렇게 좋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난 인간과 하나님 중에서 의지할 곳을 인간에 찾은 대가를 난 십 년 후에 치르고야 만다. 중학생 시절의 하나님은 의지할 아버지도, 내가 기댈 바위도 아니었다. 단지 내 죄를 심판하시는, 날 지옥에도 천국에도 보낼 수 있는 심판주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난 생각해 본다. 왜 그때 하나님이 내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았을까? 대체 왜? 그랬다면 내가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은 안 겪고 지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그즈음 하나님을 잘 몰랐다. 물론 지금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과 엮인 그즈음의 이야기 하나를 풀어본다. 나는 부산으로 이사 와 부산 수영의 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초등부, 중고등부를 다녀야 했다. 교회 형들은, 누나들은 학교 아이들보다는 내게 자비로웠던 것 같다. 비록 목사님 아들이란 꼬리표가 늘 날 따라다니긴 했지만 말이다. 목사님 아들로서 나는 교회에서 하는 일이 많았다. 찬양팀이며, 워십팀이며, 축구부며, 임원이며.(이 중 축구부만 유일하게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이었다.) 교회를 마치곤 늘 아이들과 피시방에 가기 일쑤였고, 아니면 공을 차며 놀았다. 한창 반항을 하고 있을 시기, 그러니까 내가 박솔빈이란 여자애한테 차였을 즈음의 일이다. 난 친구와 함께 성가대 연습을 빠진 적이 있다. 교회에 다니던 무서운 누나들도 참여하던 성가대였으니, 빠진 내 간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친구는 피시방에, 나는 신평에 있는 이모 집에 가려고 했다. 이모 집에는 내가 열두 살에 태어난, 내가 사랑하는 동생인 은수가 있었다. 우리 집이 있던 교회별관건물 육층에서 일층까지 나와 친구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평소와 달리, 급한 마음에 뛰어 내려가는데, 그만 내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나는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고, 놀란 친구는 내 뒤를 따라 내려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픈 몸을 부여잡고 교회를 빠져나갔다. 그때 내게 든 생각은, ‘하나님이 날 벌하셨다.’였다. 그 당시 난 이상하게 몸이 자주 부러지거나 다쳤는데, 그때도 전치 한 달의 발목깁스를 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난 그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신평까지 갔다. 신평 이모 집에서 방학을 보낸다는 핑계로 엄마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갔다. 무서운 교회 누나들이 내게 연락을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이미 전날에, 이모 집에 가겠다는 허락을 엄마로부터 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허락했는데, 자기들이 뭐라 할 건가.’ 뭐 대충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두려웠다. 두려웠지만 짜릿했다. 처음으로 교회라는 공간을 벗어나 이모 집으로 갔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처벌하실지 몰랐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짜릿한 마음이 더 컸다. 이모 집에서 투니버스를 보는 동안 두려움은 다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