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의 기억 2

by 커피탄 리

나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수영에서 살던 육 학년 무렵부터? 북삼에서 살던 삼 학년 무렵부터? 아니면, 광명에서 살던 여덟 살 무렵부터? 그 이전부터? 아마 내가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일곱 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몸이 왜소하신 분이시다. 대신 마음이 강건하시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동해의 파도 같고. 나는 파도 위에서 쉽게 난파되는 작은 배 같다. 어려서 나는 몸이 작으신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다. 내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분처럼 몸이 작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교회의 청년들이 교회 안에 있던 사택인 우리 집에 놀러 오면 곧잘 하던 소리가 있었다. “XX아, 너 아버지보다는 키가 더 커야지.” “아버지 보다 잘 돼야지?” 나는 이들이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키 작은 아버지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런 말을 하며 웃곤 했던 그들이 기억이 난다. 그들에게는 그 말이 농지거리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크나큰 상처이자 스트레스였다.

다른 아버지들은 다 키와 덩치가 컸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아버지처럼 머리숱이 적지도 않고 눈도 작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아버지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거기서 다면 모를까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잘 놀아 주지도 않으셨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교회 마당에서 야구공을 던지는 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내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서. 그전까지는 캐치볼다운 캐치볼도 아버지랑 함께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바쁘셨으니까. 아버지랑 같이 공을 찬 것도, 중학교 때 교회에 축구부가 생기고 난 다음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중고등부 담당이셨고,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하셔야 했다. 그때서야 나는 땀을 뻘뻘 내며 달리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교회 체육대회에서 키 큰 어느 목사님은 홈런을 뻥뻥 치셨는데, 달리기도 빠르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셨다. 체육대회 때도 사무적인 일로 잘 즐기지 못하셨던 아버지가 기억이 난다. 내겐 항상 아버지가 의문이었다. 아버지가 작으면 나도 작아지는 기분이었고, 아버지가 못하면, 나도 못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시 내게는 세상과 나를 비교할 거리가 스포츠밖에 없었다. 나를 증명할 거리가 스포츠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든 잘 나려면, 거기서 두각을 보여야 했다. 나는 그렇지 못한 남자를 남자답지 못하게 보았다. 런 의미에서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가 뛰시는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다행히, 크면 클수록 내 시야는 외모와 외적인 것을 벗어나 다른 것으로 향했. 그리고 외모와 외적인 것이건 다른 것이건 둘 다 유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선 여전히 외모와 외적인 조건이 최상이 가치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상위의 명예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사랑. 생명을 살리는 일과 때 놓을 수 없는 사랑을 행하는 일일 것이다. 올 세상의 그림자요 축소판 밖에 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도 남을 돌보고 섬기는 행위를 고귀하게 쳐 춘다. 그렇게 여겨주는 사람들은 교양이 있다. 그 하위 가치로는, 명예, 부, 지식, 외모, 물질 따위의 것들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신봉한다. 나 역시도 상식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의 눈이 뜨이고 보니, 이 세상 외에 다음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보니, 다르게 보이던 것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물질도 외모도 하위 축에 속하는 우리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천국에서는 큰 자라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교회에서 봉사하시며 생명들을 살리셨다. 그리고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도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슴과 손에 성흔으로 남아있다. 그만하면 되지 않겠는가. 뭐 좋은 세상이라고 다른 것을 더 추구한단 말인가.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다.

나는 중학생 시절 내내, 교회 목사님한테 찾아가 부탁드렸다. 키가 백칠십 센티미터까지만 크게 해 달라고. 나는 날마다 기도했다. 내 소원대로, 아니 내 소원보다 넘치게 지금 내 키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이다. 한 때는 더 크길 바랐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키가 훌쩍 커져버린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평탄했던 시절인 고등학교 시절을 맞게 되었다. 부산시 연제구에 위치한 남일고등학교. 그곳이 내 모교이다. 남일고등학교에서는, 비록 공부는 잘 못했지만, 급우들과 사이도 좋았고 선생님과도 관계가 좋았다. 선생님은 마음씨 따뜻한 젊은 여교사셨고, 우리들은 남고생들답게 장난기가 많았다. 지각대장인 나는 일 학기를 아주 유복하게 보냈다. 유복하단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주말마다 학교에 올라가 축구를 했다. 평일에는 이십 분도 넘게 걸리는 등산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로 올라갔다. 때로는 야자를 재끼고 피시방에 가기도 하고, 옆 동네에 있는 닭꼬치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우리는 천방지축이었고 시간은 구름과 함께 잘만 흘러갔다. 여름이 지났고 이 학기가 되었다. 이 학기가 되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방학 자율학습 내내 지각을 했고, 지각통장에는, 내 지각비로 어마어마한 돈이 쌓였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다시 유복한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상기할 점이 있다면, 내가 축구 이외의 다른 문화에 눈을 떴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힙합이었다. 수련원으로 가던 차 안에서 반 친구가 듣고 있던 빈지노의 노래. 그 노래가 앞으로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 채 나도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시월이 되었다. 나는 또다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사를 가야 했다.

나는 차라리 나는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모집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했다. 날 두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우리 가족 안에 혼란이 일었다. 여러모로 정신이 어수선했다. 그 어수선한 시기에 우리 집에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새로운 남동생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국 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나는 울면서 정든 부산을 떠나야 했다. 중학시절 때부터 놀던 열두 명의 친구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들까지 두고서 새로운 환경으로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을 실은 차는, 산굽이를 수십 차례나 넘었다. 그동안 낙동강도 넘었고, 구름도 몇 개나 추월해 갔다. 차가 도착한 곳은 함안군 칠원이란 산골짜기였다. 긴 대로에는 화물차들이 소란스레 지나다니고, 신호등 대신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낡은 육교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거렸다. 곳곳에 잡초와 황화가 얼굴을 샐쭉 내밀어 나를 불쾌하고 바라봤고, 보랏빛 하늘은 암운을 드리고 있었다. 육교에서 언덕 하나를 오르면 숲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 우리가 살게 될 아파트가 있었다. 아파트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마트라곤 작은 동네마트 하나가 전부였다. 피시방도 없어서 나와 내 남동생은 곤욕을 첫날부터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학교는 집에서 삼십 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아이들은 집단적이었고, 이 부산에서 온 이방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도 없었다. 선생은 시험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내게 교과서를 주었다. 나는 오히려 교회 사람의 지인을 통해 교과서를 구해야 했다. 축구는 물론, 난 아이들과 어떠한 스포츠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내게 먼저 같이 하자고 하는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하자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나는 그런 것이 서툴렀다. 나는 소년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어처구니없지만, 우울증의 습격에 난 쓰러져버렸다. 결국 가족 내의 엄청난 실랑이 끝에 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산속 아파트, 푸르스름한 그늘이 지는 아파트 거실에 나는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내 자퇴 시절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내 일상적인 루틴은 이랬다. 난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강의를 듣고, 아니 듣는 척하면서 만화를 보거나 역사 기사를 찾아봤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에서 아버지 차를 기다릴 때, 남는 시간에 나는 <WHY>시리즈로 역사를 배웠다. 물론 그것만 읽은 것은 아니다. 나는 역사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고,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이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자격증이 있었다. 아직은 그렇게 고독하지 않았다. 내겐 가족이 있었고, 연락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새로 사귄 대학생 형도 내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점점 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내 새로운 남동생을 돌봐야 했으므로, 날 돌봐줄 시간이 없었다. 온 가족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옮겨갔다. 또 내겐 허용되지 않던 모든 것들이 그 아이에게는 허용되었다. 난 내가 십수 년간 교회 안에서 살면서 지켜왔던 모든 법칙들이 무시되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다. 나는 부모님이 내게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도, 크게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그 아이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다 가지고 있었다. 훤칠한 외모와 큰 눈 따위의, 내가 전부터 외적으로 집착했던 것들 말이다. 그 아이는 점점 커가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가는데, 나는 점점 못나지고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왕좌를 빼앗긴 왕의 기분. 어미 사자의 품을 빼앗긴 새끼 사자의 기분. 그런 기분이었다. 내 시선은 지평선보다 아래였고, 시야는 보랏빛이었다. 난 늘 불안했다. 나는 내 방으로 문을 잠그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 두 번째 박 씨가 나타난 것도 이 시점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박현주였다. 박현주는 시골의 학교에서 얼짱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를 교회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나는 그 아이를 이년 동안 짝사랑하게 된다. 처음에 잠시 좋아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혼에 불꽃을 다시 점화하게 되었다.

그 이년 동안은 지루한 생활의 반복이었다. 나는 교회 집사님의 소개로 집에서 차로는 십오 분 떨어진 아파트에 수학 과외를 받으러 다녔다. 어쨌거나 고등학생이었으니 말이다. 수학 과외를 끝내고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일부러 걸어 다녔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재즈힙합 그룹 재지팩트의 노래들을 홀로 중얼거리면서 시골길을 걸어 다녔다. 외롭지 않은 들길이었다. 건물들은 도시처럼 밀집해 있지 않았다. 건물 하나가 논밭 하나를 끼고 있는 식이었다. 바람이 신호하면, 논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춤을 췄다. 빈 도로 위에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사람 사는 마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작은 마을을 강한 햇빛은 쓸쓸히 비춰주었다. 하늘은 늘 높고 하얀 구름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차로는 십오 분도 걸리지 않는 길이었는데. 구름 속에는 부산에 사는 친구들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해가 떠 있을 때나, 질 때나, 그 얼굴들은 변하지 않고 날 향해 웃고 있었다.

열여덟 때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던 박현주는 여기서 등장한다. 박현주와 나는 교회에서 때때로 보며 인사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몹시 꾸몄고, 무조건 그 아이가 날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의 구할 이상을 차지한 그녀는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나에겐 이상향의 그녀였다. 어느 날, 돈이 궁했는지, 그녀는 내게 편의점 대타를 문의했다. 나는 묘한 꾀를 생각해 냈다. 대타를 하는 대신 그녀와 내가 협조 형식으로 같이 알바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고 받는 돈의 반을 그녀에게 주기로 했다. 그녀는 마치 내 여자 친구처럼, 아니다, 친구처럼 나에게 처신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나는 여자 친구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알바는 이틀 동안 같이 했고 나는 그 아이에게 약속한 돈을 주었다. 그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그 돈을 받았고, 내게 그 돈을 받았다며 자기 엄마한테 자랑을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자기 엄마한테 말했다는 말도. 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서도 계속 그녀에게 접근했다. 몇 달 뒤 내가 고백했을 때, 그녀는 날 차갑게 거절했다. 나에게는 그녀밖에 없었는데, 이제 부모님도, 친구들도 마음의 거리에서 멀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나를 이용했다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욕조에 들어가서 한 시간 넘도록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은 인생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이제는 상처를 더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많은 생각을 했다. 뜨거운 욕조 물 안에서, 멍하니. 그리고 욕조에서 나와서 가족들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 내 인생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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