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의 기억 3

by 커피탄 리

그전까지의 내 인생에서 독서란, 시간을 때우는 용도에 지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때 전 과목 교습소에서 <WHY시리즈>나 <그리스로마신화>와 같은 만화를 보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삼국지>, <수호지>를 읽거나, 한국의 삼국시대와 관련된 책들을 보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욕조에 들어갔다가 나온 이후로 독서는 내게 인생이 되었다. 그 무렵 교회의 한 장로님이 내게 <데미안>을 선물해 주신 일이 있다. 나로서는 관심도 흥미도 없는 문학이었지만, 속이 공허했던지 그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은 어느 정도 내 공허한 속을 채워 주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나는 이후로 미친 듯이 문학을 탐독하게 된다. 쥘 베른의 소설들과, 요한 볼프강 괴테, 윌리엄 셰익스피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과 희곡들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길을 걸어갈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일 또한 무엇이든 남동생과 비교를 했던 내 비교의식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한 군데에서 정도는 우위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것이 지식이었고, 지식을 채워주는 데에는 독서만 한 것이 없었다. 책들을 조달하기 위해서 나는 집에서 삼십 여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했다. 도서관 가는 길은 또 하나의 해방의 순간이었고, 나와 자연이 접촉을 하는 시간이었다. 비록 지독한 냄새를 - 특히 젓갈 냄새가 기억이 난다. - 풍기는 공장단지들이 긴 길을 따라 이어졌지만. 그 공장길 옆으로는 강이 흘렀는데, 강변 전신주 아래에는 쓰레기 더미들이 가득했다. 무성하게 자란 수풀은 누구의 관리도 받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 동네에서 많이 피던 황화가 수풀에 흐드러져 있었다. 청둥오리 가족이 강물을 헤엄치거나 물속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물을 마셨다. 두루미나 학 따위도 억새풀 사이에 숨어 있다가 바위나 강물 위로 뛰어올랐다. 하늘은 대체로 맑았고, 뭉게뭉게 핀 구름들이 강물 위로 지도를 그렸다. 그 길로 십 여분 정도 걸어가면, 우리 아버지가 담임 목사로 근무를 하시는 작은 시골 교회가 있었다. 가기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교량을 주위로 낮은 집들이 장난감블록처럼 쌓여 있었다. 그 길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 길은 내 마음속 깊이 저장되어, 지금도 내가 문학 활동을 하는 데에 자양이 되어 주고 있다.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하나님이 내게 이처럼 고독한 시기를 주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시기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는 혼자만 남은 시기들이 많은데, 거기에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도서관에 거의 매일 갔고, 한 번 책을 빌릴 때, 다섯 권씩 일주일 정도를 빌렸다. 독서 주기가 짧고 독서량이 많았다. 지금도 그때를 흉내 내어 그때처럼 읽어보려고 해도 읽어지지 않는다. 그때만큼 책에, 책 속 이야기와 인물들에 몰입하여 독서를 했던 시기는 없었다. 그러다가 계획에도 없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기류의 글에 내 심정을 토로하는 글을 썼다. 그러다가 점차 시, 소설로 범위를 넓혀갔다. 나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가였고, 끊임없이 뭔가를 적는 작가 흉내쟁이였다. 나는 그렇게 반년을 보냈다.
그러던 열아홉 살 유월, 나는 전에 없던 반항을 하게 된다. 무려 고삼 때의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낮마다 밤마다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읽던 책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는데, 나는 책들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으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부모님께 미술을 하겠다고 말했다. 내 말에 집안은 뒤집어졌다. 고 삼 유월 달에 미술을 하겠다니, 어머니와 나 사이에 엄청난 다툼이 벌어졌다. 그 다툼 끝에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며칠의 공방전 끝에 어머니는 결국 내 편을 들어주셨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어머니로서는 엄청나게 자기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신 것일 것이다. 실은 어머니는 진작부터 내게 미술을 시키실 생각이 있으셨다. 중학생 때도, 그리고 고등학생 때인 이곳 칠원에 와서도 미술 학원을 보내려 하셨다. 하지만 그때는 때가 맞지 않아 보내지 못하셨다. 어머니 당신은, - 고삼 때인 그때가 - 때라고 생각하셨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미술 학원을 가게 되었다. 학원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었다. 학원은 내가 다섯 살 때 살았던 합포구 장군동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함안군 칠원읍에 있는 집에서 농어촌 버스 250-1번을 45분 정도 타고 가면 난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버스는 마산 내서를 지나 회원구, 합포구의 골목을 어느 정도 쏘다닌 다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낮고 하얀 집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고 나는 그 햇살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버스는 빛의 꼬리를 잘도 쫓아갔다. 내가 책장을 스무 장쯤 넘겼을까, 서늘한 바람에 잠이 몰려오곤 할 때, 버스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큰 빌딩의 건물 세 층을 쓰고 있는 학원 오 층에는, 디자인을 지망하는 아이들이 서른 명 정도 앉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맨날 책장만 펼쳤다 접었다 하는 나를 굉장히 신기하게 보았다. 그 아이들은 내게 다가왔고, 내게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해주었다. (그때 다가왔던 친구 중 한 명은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 까지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난 아이들의 도움으로 학원에 잘 적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학원 아이들과 야구도 같이 하고 목욕탕도 가는 둥 좋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내 독서가 끝나지는 않았다. 같이 밥을 먹던 친구가 나보고 ‘책을 덮고 이야기를 하자’고 핀잔을 주고 난 뒤에도 난 계속 책을 읽었으니 말이다. 학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때도, 친구들이 옆에서 말을 걸을 때도, 식당에서 밥을 기다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을 덮지 않았다.
대체 내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학원을 다녔는지 모르겠다. 몸과 머리는 입시 미술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문학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육 개월 만에 입시 미술에 성공할 리 없었던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서울대를 갈 수 있을 거라는 학원 원장님의 말이 큰 몫을 했다. 나는 재수를 하게 되면서 디자인 반을 떠났다. 아이들은 일월, 이월의 정시를 준비하는데 나는 수시만 마치고서 재수를 준비했다. 집에서 부모님 몰래 좋아하는 책의 삽화를 그리던 나는 본래 회화 반에 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학원 원장님의 조언으로 디자인 반을 갔다. 디자인은 정말 최악이었다. 나는 내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미술과는 달랐다. 물론, 대학을 가기 위해서라면 시키는 것이 무엇이든 잘 해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뭐든지 하기 싫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미술입시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나는 건물 삼층으로 회화 반으로 내려왔다. 그때는 온 거리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또 학원 로비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불을 반짝거렸다. 디자인 반 친구들은 나를 보러 회화 반으로 내려오곤 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회화 반으로 들어간 뒤, 나는 여전히 그림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모든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건만, 그래도 흥미를 찾지 못했다. 입시를 흥미로 시작하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입시라는 발상 자체를 미워했다. 입시가 과연 변별력의 기준이 된단 말인가? 학교별로, 스타일에 맞게 완성도를 올린 그림을 완성하는 미술이, 과연 미술이란 말인가? 이런 의문이 굉장히 심했던 것 같다. 그런 의문은 대학 시절 내내 이어졌다. 입시 미술의 방식과 형식에 젖은 대학 아이들이, 그림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보게 되면서 나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관찰도 없이 그저 비례를 제서 사진의 빛을 따라 그리는 그림이 변별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에 관해 깊게 생각을 해 보지 않은 미술 관계자들이라면, 이 방식이 가장 최선이란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 회화 반으로 왔다.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한 여고생과,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와 함께 반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 반은 우리 셋이 다였다. 나는 그림보다는 책을 더 읽고 싶어했고, 누가 말을 걸어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재수를 할 때, 나의 방랑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이 되면, 밥을 얼른 먹고 식당을 나섰다. 노트 한 권과 시집 한 권을 들고 – 정지용의 초판본 시집이었다. - 마산항까지 나갔다. 식사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이었고, 내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나는 왕복 삼사십 분에 달하는 거리를 매일 오갔다. 볼품없는 조그마한 마산항에 나가서, 등대 앞에 서서 파도나 보면서, 또 갈매기들이나 구경하곤 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마산항에 하루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속이 답답해서 터질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입시 미술에 반감을 가졌을뿐더러, 원래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거기다가 재수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전부다 내가 선택한 결과 값이긴 했지만. 나는 시를 읊었다. 괴테의 <서동시집>을 읊었을 뿐만 아니라, 정지용의 시집을 통째로 외웠다. 학원 수업 시간에도 메모장을 펴 놓고, 떠오르는 글 착상을 메모했다. 항상 곁에 책을 주고 쉬는 시간마다 책을 펼쳐 보았다. 사월이 지나고, 유월이 지나고, 팔월이 지나고, 수시 철인 십일월이 되었다. 거리에는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었다. 나는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서동시집>을 읽었다. 나는 차 안에서나 식당에서나 책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장편 소설을 집필하곤 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 첫 시집에 넣을 시들을 점검하거나. 이렇듯 나는 미술 외의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성향이 내가 후에 대학 미술을 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되어주었던지! 그때는 또래들 중에서는 거의 인문학의 도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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