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의 기억 4

by 커피탄 리

나와 회화반 아이들은 창원과 마산을 오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창원에 있는 학원은 창원에서 가장 번화한 상남동에 있었다. 상남동은 면적 대비 유흥업소가 세계에서 가장 밀집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는 그곳 특유의 퇴폐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는 세상의 좋지 않은 것은 모두 개혁한다고 봤던 개혁, 계몽주의자였다. 더욱이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런 사람들이 입시미술을 만들고, 잘못된 한국 교육제도를 만들고, 한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는 모든 한국문화에 순수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상남동의 세태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한국적인 것은 외래에 물이 들었다고 믿었다. K-POP이니 하는 세속 문화는 가볍고, 쾌락적인 문화에 불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대를 하기 시작한 기원을 찾아보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삼국사기를 지었던 김부식에게 있었다. 나는 그를, ‘조선역사일천연래제일대사건’이라고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적극적으로 막은 외래 문물의 괴수라고 보았다. 나는 그를 증오했다. 역사 속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다. 한편 나는 묘청을 옹호했다. 묘청을 주인공으로 하는 극을 한 편 쓰고 싶었다. 쓰는 것에서 벗어나 그 극으로 명성을 얻고 싶었다. 한국을 외래 문물에서 구하는 진정한 선구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하라는 입시 미술은 하지 않고 대충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제 이의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가 될 수 있다고 간절히 바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들은 헛되고 헛된 생각일 뿐이었다.

당시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했던가? 하나님은 예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내겐 멀고 두려운 분이었다. 나는 그분 앞에 상습적으로 음란 비디오를 보고 부모님께 불순종하는 아이였다. 또한 서양의 사상과 철학에 마음을 빼앗겨 당신의 진리마저 거스르려 하고 있었다. 내 속은 공허했고, 공허할수록 더 큰 우상을 만들고 새겨 내 마음속의 신전에 진열하고 싶었다. 나의 우상은 괴테였다. 그렇다. 독일의 대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말이다. 처음에 그는 내게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존재가 되었고, 외로운 내 스승이자 아버지가 되었고 결국에는 신이 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작품의 문구 하나, 그의 생각 하나가 어린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닮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말이 아니다 하는 것을 나도 그르다 했고, 그의 말이 맞다 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전집을 다 읽고, 그가 읽었던 책을 읽고,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진정한 후계자이자 대변인이 되려고 했다. 나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나는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유리되어 외로웠고, 외로움을 다른 사람의 인정으로 채우고 싶었다. 세상에서는 내가 돋보일 수 있는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문학세계에서는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상상력으로만 작동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일인자가 되려 했다. 신에 필적하는 존재인 괴테의 말을 따라 하면 그렇게 될 줄로만 믿었다.

<데미안>, <수래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 <크눌프>, <유리알 유희>로 시작되었던 독문학에 대한 관심은 괴테에 이르러서는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그의 어떠어떠한 책을 읽었는지 다 나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를 그렇게 우상처럼 열렬히 숭배했고, 그때는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성경도 읽었다. 하루에 네다섯 장씩, 일 년에 한 권을. 하지만 나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려는 마음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의 말씀에 못 이겨 매일 공부하기 전에 성경을 읽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따뜻한 시선으로 날 향해 팔을 벌리고 날 바라보든 말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딱딱한 말씀만을 받아들였다. 이는 내 문제임과 동시에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교회에서는 설교를 한다. 성도들은 ‘아멘’ 하고 형식적으로 대답을 한다. 설교를 끝나고 예수님의 제자처럼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때까지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차가운 세속인이었다. 예수님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라 하셨지만, 그들은 싸우고 꾸짖고 서로를 교회에서 쫓아내려 애썼다. 당장 내가 입시를 하고 있을 때, 칠원에 있는 시골 교회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교인들은, 사랑도 없이, 다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복을 받기 위해, 헌물을 열심히 한다거나, 새벽기도를 나온다거나 하는 율법들은 잘 지켜지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한다거나, 이웃을 위해 헌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율법들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런 환경의 최전선이자 정중앙부에서 자라왔던 나는, 좋든 실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자랐던 것이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내게 하나님은 두렵고, 어딘지 부담스러운 분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어 그분을 한 인격으로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전에 있었던 일이다. 스무 살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학원에서는, 내가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접어버리고, 창원의 모 대학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다. 나는 스무 살 삼월에 서울대를 준비하는 입사반에 들어갔다. 입사반 수업은 당시 내가 따라가기에는 버거웠다. 그 수업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을 가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부족했다고 밖에는. 그곳에서 나는 한 선생님을 만난다. 작은 키에 늘 화가 모자를 쓰고 다니는 코가 둥근 선생님이었다. 안경을 뿔테였고, 늘 조끼를 걸치고 다니는 차림새는 단정했다. 처음에는 그 선생님한테서 어떤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 수업 시간에 그가 에곤 실레의 드로잉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어떤 수업을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그가 나의 문학지도 교사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매 수업이 끝나고 나와 그는 학원의 작은 상담실에서 만났다. 우리는 거의 두세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인문학에 대해, 괴테에 대해, 빙켈만에 대해, 그 외 많은 예술가들과 문인들에 대해,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살면서 그 사람 정도로 학식이 깊은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스승을 죽여라.’는 말을 해주며, 나의 사유 활동을 지지해 주었다. 또한 내 문학 작품들 – 장편 소설 한 권과 시집 한 권에 대해 – 찬찬히 읽어보고 피드백을 해 주었다. 그는, 비록 작품으로서는 아직 가치가 없을지는 모르나 내 글쓰기 자체는 긍정적이라는 말을 해 주었다. 나는 그와 나의 관계를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관계와 비유했다. 그는 내게 머물렀고, 내가 내 세계를 찾아가는 데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와 나의 관계는 내가 입시를 마치고 난 뒤인, 다음 해 삼월까지 지속되었다. 나는 그의 집이 있는 울진으로 가서 하루를 묵기도 했다. 울진 바다를 뒤로 남겨두고 그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너는 기대가 된다. 기다리겠다. 잘 쓰든 못 쓰든 계속 쓸 테니까.” 내가 인생에서 들은 최고의 지지이자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그와 연락하지 않았다. 이후 기독교에 심취한 나의 기독교적 사상과 그의 사상에는 맞지 않는 데가 있었고, 나는 기독교도로서 새로운 길을 걷기로 완전히 작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 있었던 한 사건, 스무 살 크리스마스 즈음 벌어진 가출 사건을 서술하기 전에 서론이 너무 길었다. 본론과 결론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발단은 내 지독했던 열등감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남동생이 새로 들어오고 난 뒤로, 난 전에 없던 어두움 속에서 괴로움에 시달렸는데, 내 열등감 때문이었다. 위에 설명했듯이 난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으며, 책 속의 세계로 내 호적을 옮겼다. 거기에는 친구들이 많았으며, 나를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교회에서, 내 새로운 남동생이 사랑받는 교회에서, 나는 심리의 가장 매운맛을 맛보고 만다. 한 집사님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고, 그만 교회 벽을 뻥 발로 차버렸다. 합판으로 이루어져 있던 교회 벽은 구멍이 뚫려 버렸고, 나는 그 길로 교회에서 달아났다. 머릿속에는, 이제는 아버지가 교회에서 쫓겨날 거라느니, 나는 끝이라느니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내가 그동안 숨겨왔던 동생에 대한 미움이 들통났던 순간을 회상하며, 나는 괴로움에 휩싸였다. 나는 걸었고, 논밭을 지나갔고, 차도를 따라 올라갔고, 신호등과 도로 표지판을 몇 십 개나 지나갔다. 연말이라 날씨가 추웠고, 나는 지갑도 챙기지 않고 달아났으므로,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거의 네 시간을 걸어 함안에서 마산 시내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옛 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가려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한 친구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거기로 갈 수 없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거절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차마 집에 전화를 걸지도 못하고 시내를 배회했다. 몇 시간을 배회했는지 날은 저물어 저녁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아홉 시쯤이 되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차도 위로 차들이 쌩쌩 달렸다. 경찰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 위를 지나쳐갔다. 나는 그때,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했다. “나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날은 여전히 추웠고, 손과 볼은 얼어붙었다. 시골의 밤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떠올라 하늘을 밝혀주고 있었다. 간신히 나는, 밤 열두 시가 되어 집에 도착했다. 나를 혼낼 거라 예상했던 부모님은, 내 예상과는 달리 나를 걱정스레 맞아주셨다. 날 위해 경찰서까지 가서 경찰차들까지 동원했다며, 이 시간까지 아버지랑 어머니 두 분이서 밖에서 날 찾다가 오는 길이라며, 그분들은 나를 혼내지 않으셨다. 교회 벽에 대해서는 원래 합판이라 잘 부서지는 것이라며, 내가 왜 사라졌는지를 의아해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왜 나는 그 멀리까지 도망쳤을까? 그저 실수로 그랬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나는 그날 이후에 하나님께 살짝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전 05화청소년기의 기억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