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최종화)

by 커피탄 리

나는 석 달간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에 몰두했던 지난 일 년. 빨리 결과를 내고 싶었던 마음. 하지만 전문가로부터 듣게 된 좋지 않은 평. 이미 된 줄 알았던 등단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 그 모든 것들이 내 마음에 충격을 줬던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에 누워있었다.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나의 기상 시간은 정오였다. 잠을 하루에 열두 시간도 더 잤으니 말이다. 나는 그 기간 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마음은 늘 위태위태했다. 나는 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 증세가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하셨다. 너무 일을 잘하려 하고 많이 하려 해서, 또 그렇게 해 왔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다행히, 상담을 한지 두 달 만에 내 증세는 호전되었다. 상담사 선생님의 실력과 노련함에 감사를 드린다.

상담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일만큼 공부하면 일만큼 얻고, 십만큼 공부하면 십만큼 얻는다. 너는 백만큼 공부하려 해서 문제." 그 말은 내 정곡을 그대로 찔렀다. 시집을 퇴고한다고, 또 조급한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나는 매일매일을 시에 집착했다. 그 생활이 얼마나 나를 피곤하게 했는지를 내 몸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상담사 선생님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내 무기력의 원인이 여기 있다고. 거기다가 기대만큼 결과가 안 따라주니 그런 것이라고, 노령의 노련하신 상담사인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상담을 받았던 시간과 함께, 다사다난했던 스물다섯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스물 다섯 겨울, 나는 매주 술을 마시러 다녔다.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매일 잠을 이룰 수 없었기에, 그 허망한 마음을 술로 해갈하려 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와 매주 만나 술을 마셨다. 하단, 서면 등지를 오가며.

왜 기장에 사는 내가 하단까지 오게 되었느냐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우리 가족이 또다시 이사를 갔다는 것에 있다. 일 년 동안 목회를 쉬시던 아버지가 또다시 일을 하게 되시면서, 우리 가족은 기장에서 사하구 장림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다대포의 작은 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시게 되었다.

여전히 내 삶에 하나님은 없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해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이 내리는 벌판을 종착지도 모르고 횡단했다. 눈앞에는 빛이 있었다. 빛은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버스였다. 버스는 한 정류장 앞에서 멈춰 섰다. 많은 승객들이 멈춘 버스 위로 올라갔다.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 줄을 서 있는 사람, 또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나도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눈밭에 넘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버스는 승객을 거의 다 태우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난 좌절했다. 버스는 빛을 눈 위에 흩뿌리며 사라져 버렸다. 빛은 아예 사라졌다.

내가 무기력 증에서 벗어날 즈음, 난 다대포의 한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었다. 또 혼자서 습작 소설들을 썼다. 도서관 창문 밖으론 다대포 바다의 겨울 풍경이 보였다. 연푸른색의 바다 위로는 붉은 해가 씨앗처럼 떨어졌다. 나는 바다의 뱃살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졌다. 나는 보았다. 유리창 속의 누군가가 내 볼을 만지고 있는 모습을.

스물여섯 살이 된 나는 그동안 해오던 미술을 포기했다. 그리고 다른 전공 선택하여 편입을 했다. 나는 입시시절부터 삐걱거렸던 미술보단,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글을 주업으로 삼고 싶었다. 글쓰기로 먹고 살려하면 그 외의 일로 수입을 내야 했다. 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때마침 부산 영도의 XX대학교의 한국어 교육학과에 수학 중이던 이모의 조언을 들었다. 졸업 시 한국어 교사 2급 자격증이 나오고, 그 자격증으로 세종학당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나는 한국어 교육학과로 적을 옮겼다. 편입 과정은 수월했다. 시험도 없이 면접만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그 학교는 기독교 재단의 소유였다. 우리 아버지와 이모와 이모부가 나오신 대학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 기독교에 대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학교에 들어가면 내 기나긴 겨울도 끝날 것이라는 희한한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는, 나는 본 전공 학생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수업 전부터 문학 책을 펼쳤고, 수업 시간에도 조금씩 넘겼다. 수업이 끝나고는, 끝나기가 무섭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서 시의 이론에 대한 책과 시집들을 탐독했다. 그때 나는 영도의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사시는 임대아파트는 학교 바로 앞 오 분 거리에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는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쿰쿰한 냄새가 나는 좁아터진 거실, 일인용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계셨다. 나는 장롱에 허리를 대고 책장을 넘겼다. <파우스트>를 십 페이지 정도 읽고, <신곡>을 조금 읽다가, 초현실주의 기법에 관한 책을 읽는 식이었다. 나는 당시 의식의 흐름기법에 꽂혀 있었다. 한창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 책, 처 책을 뒤졌다.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인터넷으로 주문해 보았다. 그러고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 의지해 시를 썼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가 조그마한 상에 저녁을 준비해 오시면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또 책을 읽었다. 그해 봄, 날씨는 대체로 흐렸고 비가 많이 왔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베란다 창문을 열고 흐린 바다를 보았다. 바다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구경했다. 밤에는 새벽 두 시까지 영상을 보다 잠들었다. 일곱 시에 할머니가 깨워주시면, 비몽사몽 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었다. 종종 밥을 먹는 내 옆에 이모가 와 계시기도 했다. 이모는 밥을 다 먹은 나를 차에 태우고 산을 올라 학교에 갔다. 삼월 말부터는 벚꽃이 폈다. 벚꽃은 피기도 전에 졌는데, 그해 유독 비가 많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벚꽃을 비롯한 봄꽃들을 보며 시상을 떠올렸다. 수업시간 중간중간에 시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습작들은 대체로 완성도가 좋다. 하지만 나는 이후 그 시들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굉장히 사람이 고팠던 것 같다. 시를 쓰면서도, 도서관을 기웃거리면서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기다렸다. 시를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도 사람의 애정이 필요해서겠지. 괜히, 도서관 사 층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도, 사람들이 내게 와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나는 학과 임원에게 연락해, 학회에 소속되고 싶다고 했다. 때마침 학회에는 총무 자리가 비어 있었다. 사람이 급했던 임원들은 좋다고 나를 받아들였다. 실상은 학회보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던 내 속은 모른 채. 나는 아주 손쉽게 학회 임원이 되었다. 학회 임원들은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여자아이들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별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중 몇몇과 친해졌다. 중간고사 즈음에 가서는 단체 카톡 방에서 한참을 떠들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학회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그 아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는 그 아이에 대한 시를 열몇 편 썼다. 하지만 그녀가 내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나는 그 마음을 잘 숨겨두도록 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기도라는 것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만의 기도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자와 잘 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간절히, 간절히 찾았다. 그 전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고 생각했음에도, 나는 혹시 몰라하면서 하나님을 찾았다. 나는 스물한 살,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방언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팠던 지난 시간 동안 방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방언이 잘 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성령이 날 떠나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아이와 잘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나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방언이 술술 나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기도 속에서 평안을 누렸다. 평안 가운데서 하나님이 날 버리시지 않으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뒤 네 달 동안 나는 그 아이와, 그 아이와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기도를 했다. 채플 시간에, 그 아이는 내 먼 왼쪽 바로 아래층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아이와 친해지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나와 인사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서 채플실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리고 단짝인 여자 아이와 함께 유유히 밥을 먹으러 갔다. 나는 마음 아파하며 이에 대해 계속 기도했다. 내가 계속 칭얼칭얼 대자 결국 하나님이 일하셨는데, 일은 이렇다. 당시 학회 임원진 중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자주 어울렸다. 총무, 부총무, 학회장 이렇게 셋이었다. 그중 부총무는 나였고, 총무는 그 아이였다. 우리는 학회의 중요 사항들을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자주 해야 했다. 해서 우리 셋을 위한 단체 톡방도 따로 파졌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나와 그 아이를 계속 엮어주셨다. 처음에는 셋이서 밥도 같이 먹지 않았는데, 우리는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 밥을 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슬픔에 대해 토로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해양대 근처의 바다로 택시를 타고 가기도 했다. 즉흥적으로 광안리에 밤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반복되며, 나와 그 아이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는 벽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름이 되었을 때는, 우리는 몹시 가까워져 있었고, 여름 방학 중간에 나는 그 아이에게 드디어 고백을 했다.
내가 그 아이에 대한 기도를 시작하던 당시, 나는 한 선교단체와 연결되었다. 선교단체 측의 적극적인 주도로 여름 즈음, 나는 그 단체의 예배에 나가게 되었다. 버림받은 줄 알았던 내가 선교단체와 연결이 되다니. 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여자아이와 나를 가깝게 해 주신 것부터, 선교단체와 연결해 주신 것까지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하는데, 나의 모든 일에서는 아니었을까. 그동안 그렇게 아팠는데, 그렇게 수많은 목소리들에 시달렸는데, 그땐 – 내가 그 아이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을 당시를 말한다. -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그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 전적으로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두 분, 이모, 이모부의 기도 덕택일 것이다. 목회자이신 그분들은 내가 이제껏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도, 갑자기 사라져서 술병을 들고 온 동네를 떠돌아다녀도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내가 그분들의 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그분들이 내게 베푼 위로들은, 가족이니까 의례히 내게 좋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분들은 무려 삼 년이나 나를 기다려주셨다. 교회를 떠나 망나니 같이 살던 나를. 그분들의 사랑에 대해 말하려면 백 페이지를 할애에도 모자랄 것이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난 이후, 내가 짝사랑하던 그 여자 아이와 사귀게 된다. 우리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사랑을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때로는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간다. 완전하지 못해도,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내가 불우하다고 생각했던 – 물론 나 스스로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 유년시절부터 나와 함께 계셨을까? 질풍노도를 겪었던 청소년기의 나를 지켜보고 계셨을까? 과연 그렇다면 왜 그때는 내게 아무런 말씀도 해주지 않으셨을까? 나는 왜 청소년기의 끝에, 재수를 할 때 글을 쓰게 되었을까? 내가 그때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 자전적인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해보려 한다. 하나님은 날 태초부터 계획하시고, 내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이미 나를 알고 계셨으며,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유년 시절에 내가 고통을 받을 때 내 곁에 계셔서 날 감싸 안아 주셨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보호해 주셨다. 내가 수없이 이사를 다니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내가 행복을 느끼게 하셨다. 내가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서는 안 되는 연애로부터 날 지켜주셨다. 시골에서 혼자 우울해하며 책을 읽을 때에도 날 지켜보고 계셨다. 반기독교적인 글을 적을 때는 마음 아파하시며 내가 그 길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셨다. 대학시절에 그림을 그릴 때 내 옆에 앉아서 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셨다. 아직 다 이해는 안 되지만, 내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도 내 기도를 듣고 계셨을 것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내 편입을 막으셨을 것이다. 아픈 시절동안 참 많이 방황을 했지만 나를 내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다시 만나주시고, 내게 너무나 귀한 짝을 선물로 주셨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내 곁에서 날 지켜보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이 글을 보는 당신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이시다. 이 글은 이러한 목적에 의해 저술되었다. 삶이 괴롭고 무기력한가, 그럼 그 시기는 당신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콜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긴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完>

이전 13화긴긴 겨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