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겨울 2

by 커피탄 리

여행은 아직 하루밖에 안 되었다. 나는 군산항에서 또다시 버스를 타고 군산역으로 향했다. 근대풍의 건물들이 그득하던 골목에서 벗어나, 다시 이십일 세기 식으로 지어 놓은 군산 KTX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이동했다. 서울에서는 주로 종로를 돌아다녔다. 나는 고풍스러운 종로가 마음에 들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채만식의 <탁류>를 구입했다. 전날 보았던 군산의 풍경을 떠올리며 책을 읽을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았다. 나는 운 좋게 경복궁 야간 개장 표를 예매해 경복궁에 들어갔다. 경복궁의 불빛을 의지해 홀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또 광화문 광장까지 걸어 내려오며 계속 사진을 찍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사진 속에는 눈에 총기를 잃고 암울한 표정을 띤 내가 있었다. 사진 속에서,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과 정적만이 내 얼굴 테두리 주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숙소는 명동 근처의 캡슐 호텔을 잡았다. 캡슐 호텔에 들어가기 전 너무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편입을 하던 곳인데, 다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라니. 내 신세가 더없이 초라하고 가엾어 보였다. 군산 여행으로 잠깐 잊었던 절망감과 공포가 또다시 몰려왔다. 나는 손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다. 삼 년 동안 피우지 않던 담배였다. 나는 그 마약에 다시 손을 댔다. 당시에는 임시방편으로 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담배는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난 이후 사 년 동안 쉬지 않고 담배를 피우게 된다. 술은 끊어도 담배는 끊을 수 없었다. 나는 서울 명동의 한 외진 공원에 앉아 담배를 연달아 세 개비나 태웠다. 아무도 모르게 가슴으로 울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정동진행 열차에 올랐다. 정동진까지는 무궁화로 두 시간이 걸렸다.

정동진에 도착하기 전부터 기차 유리창으로 수평선이 보였다. 동해의, 끝도 없이 아련하고 눈 시린 수평선이. 하늘은 색이 푸르고 차가웠다. 나는 바다 위에 누워서 찬바람을 맞고 싶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내 머릿속에서 날 괴롭히는 생각과 감정들을 모두 털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열차는 이윽고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정동진,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모자와 겉옷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넓고 길쭉한 백사장 위의 사람들은 갈매기를 쫓았다. 파도는 솨솨- 소리를 내려 해안으로 굴러왔다. 나는 해안을 따라 걸으며 숙소를 찾았다. 숙소에 짐을 놔두니 해가 졌다. 나는 밥을 먹지도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문지방 틈으로는 바람이 기어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꽁꽁 싸매고 앉았다. 그리고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가량을 간절히. 그러자 두렵고 복잡하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이제껏 그 평화를 믿지 않았다. 기도 시간에,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해도, 내가 지어낸 생각인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평화가 내 안에 젖어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평화가 온 뒤에는 도리어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가득한 평화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제야 나는 뭘 좀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으면서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본 밤바다 앞에서도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서 그날 밤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역으로 가서 동해를 거처 가는 열차를 탔다. 바다를 보면서 갈 줄 알고 그 열차를 탔는데, 바다 구간은 고작 한 시간뿐이었다. 이후로는 영주, 안동 등지의 내륙을 거쳐 기차는 움직였다. 난 실망을 안고 구포에 도착했다. 열차를 탄지 일곱 시간 뒤인,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기장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약간의 환기를 주었을 뿐, 내 인생을 바꿔놓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여전히 극심한 우울감과 절망감 속에 빠져 있었다.


이후 나는 기장에 머물며 서면까지 병원을 다녔다. 반년 동안 어떠한 대외활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글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처방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림과 글 중에서 글을 더 쓰고 싶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반년 만에 장편 소설을 하나 만들어 냈다. <엘레>라는 역사 판타지 소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성도도 구조도 형편없는 작품이었다. 당시 나는 굉장히 서둘렀고, 급히 그 소설을 e-book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 특이할 점이 있다면 내가 그 소설을 쓸 때, 자료조사를 아주 많이 했다는 점이다. 소설의 파트였던 발해의 역사를 다루기 위해, 열 권에 가까운 발해 관련 책을 사 보았다. 소설을 다 완성하고 나서는 표지도 내가 직접 그렸다. 얼마나 서툰 그림이었던지. 지금 내가 보면 실소를 머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때는 모든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나는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었다. 내 이름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다. 내 재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정말 풋내기의 생각이었다. 단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 얼마만큼의 인고의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지를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소설을 출판하고 나서, 나는 정식으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혼자 글을 쓰는 건 외로웠다. 나는 이런저런 사이트를 뒤졌다. 소설을 같이 쓸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트에서 한 독서모임을 발견했다. 그 모임은 서면에서 열리는 소설모임이었다. 이후 나는 그 모임과 사 년간 연을 맺었다.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지만, 증세는 계속되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그 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약을 먹어도 조금 나아질 뿐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 증세를 호전시키고 싶으셨다. 서면, 연산, 심지어 마산에 있는 병원까지 다녀보았지만, 차도는 거의 비슷했다. 마산의 어느 병원에서 신경 검사를 하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께선, 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부조화를 말씀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교감신경이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흥분을 억제하지 않는 반면, 부교감신경이 아예 활성화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은 내 심정은 참혹했다. 한 사람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그때 감정을 분출할 길을 찾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는 복싱으로 감정을 분출하는 길을 찾았다. 난 열심히 운동했다. 복싱을 하고 땀을 빼며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고 했다.


그해 늦여름, 나는 집을 나갔다. 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여름쯤 되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나는 학교에 복학하겠다며 창원으로 짐을 옮겼다.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아직 학기가 시작하기까진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글 쓰는데 온전히 할애했다. 에어컨의 물이 새는 세 평짜리 방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작업을 했다. 이주에 한 번씩은 서면의 소설모임에 나갔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술에 집중하지 못했다. 밤을 세서 글을 쓰고 또 써댔다. 아픈 데다가 자취까지 하자, 나의 생활 패턴은 무너져 버렸다. 새벽 서너 시까지 글을 쓰거나 영상을 보다 잠이 드는 날이 많아졌다. 밥은 아무렇게나 지어먹거나 시켜 먹었다. 복싱을 하고 자전거를 타기는 했지만 규칙적이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읽지 않았다. 교회도 잘 가지 않았다. 갔어도 형식적으로 갔을 뿐이었다. 나는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학교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나는 그 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리하게 알바를 했다. 알바를 한 돈으로 죄다 옷을 사 입었다. 길거리에는 낙엽이 하나 둘 떨어졌다. 나는 새로 산 머플러를 꽉 조였다.

이전의 대학 생활에선 외적인 것에 돈을 쓴 적도, 외적인 무언가를 추구한 적도 없었다. 내 관심사는 하나님과 미술이었고, 하나님을 위해, 그림을 위해 내 모든 시간을 다 바쳤다. 하지만 난 변해 있었다. 방 안에는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몸에는 향수냄새가 났다. 머리에선 무스 냄새가 났다. 코와 귀에는 피어싱이 뚫려 있었다. 난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다. 내 자취방은 술 방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학과 사람들과 술을 마시거나 혼자 마셨다. 몹시 적적했던 나는 자취방으로 사람들을 많이 초대했다. 손님 중 하나는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문병을 왔던 선배였다. 그즈음 나는 그 선배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미술적으로도 통했고, 문학적으로도 통했다. 나는 날마다 그의 대학원 실기실에 찾아가서 같이 그림을 그렸다. 밤에 우리는 그의 집이나 내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거나 예술을 토론했다. 그 고달팠던 시절에 상기할 점이라면 그런 소소한 점들이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눈은 하나도 내리지 않았지만, 입는 옷은 두꺼워졌다. 그때 나는 학교 본관에서 근로를 하고 있었다. 근로에서 돌아오면 나는 인터넷에서 산 전자 화로를 틀어 놓았다. 그리고 장판을 켜놓고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 시간 넘게 불멍을 했다. 그러곤 <바람의 검심>을 보았다. 넷플릭스로 <바바리안>과 역사 시리즈를 많이 보았다. 근로 외의 시간에는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소설 모임은 이 주에 한 번씩 나갔고, 글은 꾸준히 썼다. 그 무렵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위의 잠시 언급했던 짝사랑에 실패한 다음 계속 시를 적었다. 나는 내가 쓴 시를 인스타그램에 계속 올렸다. 인정을 받고 싶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관심과, 내 잃어버린 삶에 대한 보상과, 내 실력에 대한 증명을 받고 싶었다. 인스타에 나는 얼마나 많은 시를 올렸던가. 하지만 내 생각에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시인을 흉내 내는 엉터리일 뿐이었다. 이듬해 초, 그 실력으로 몇 군데 연간지와 문예지에 투고를 했다. (스무살 재수시절, 대학 시절에 이은 투고였다.) 희한하게도 이런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었다. 내가 등단을 하다니. 내가 드디어 빛을 발하고야 말았다는 사실에 나는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돈으로 시인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등단 비 십만 원을 주면 등단을 시켜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선, 나 말고도 수십 수백 명의 신인들이 신인상이라는 이름으로 시인 자격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나의 실력에 도취된 나는 그런 사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그 단체에 속해서 많은 활동을 했다. 하루에도 몇 편씩 시를 올렸다. 그곳에 속한 시인 분들이 주시는 관심에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그 착각은, 몇달 뒤 내가 신춘문예 출신의 한 시인으로부터 피드백을 받기 전까지 이어졌다. 그는 내 시를 보고 정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단체는 제대로 된 곳이 아니라고 했다. 제대로 된 곳이라면, 한 회차에 한두 명씩 신인상 자격자를 뽑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팔십 년대 이후의 시인들을 많이 연구하라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고전들을 읽지 말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이런 피드백을 듣고 몹시 당황스럽고 속이 상했다. 난 예전부터 고전을 많이 읽어왔고, 내 글의 토대가 되어준 것이 고전이었다. 그런데 고전을 읽지 말라 하니 어리둥절했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한 등단은 등단이 아니라니. 나는 그 말을 정말 참담하게 받아들였다. 하늘에서 나는 새가 날개를 잃고 땅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대화 후 한동안 나는 내 시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문제의 그 단체와 시집을 내기로 계약을 했고, 자비로 시집 오백 부를 찍어냈다. 인터넷, 서점 등지에 홍보가 될 거라는 약속과 달리, 내 시집은 어떠한 홍보도 받지 못했다. 홍보가 덜 되어 시집이 팔리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내가 실력이 있어서 큰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점에서 북 콘서트를 하는 작가들 같이 조명을 받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서점 가판대 맨 위에 놓여 있는 내 책을 집어가지 않았을까? 여하간 내 출판은 실패로 끝났다.